클린턴 장관이 요리를 가장 오래된 외교 수단이라고 말했을 때,
1814년 9월부터 1815년 6월까지 오스트리아에서 열린 빈 회의
(Congress of Vienna)를 떠올린 건 아닐까. 세계사를 조금만
배웠다면 알겠지만, 빈 회의는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전쟁을
수습하기 위해 열린 국제회의였다. 회의를 주도한 건 연합을 결성해
나폴레옹을 격파한 오스트리아·영국·러시아·프로이센 등 4대국과
프랑스였다. 어떻게 패전국인 프랑스가 승전국들과 함께 회의를
주도할 수 있었을까. 프랑스 대표이자 외무장관이었던
샤를 모리스 탈레랑-페리고르가 탁월한 외교 수완을
발휘해 4대국과 똑같은 지위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가 강대국에 의해 쪼개지는 비운을 막고 승전국들과 동등한
지위에서 협상하도록 만든 탈레랑에겐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당시 유럽 최고 요리사였던 마리-앙투안 카렘이었다.
카렘은'세계 최초의 스타 셰프'로 불린다. 나폴레옹은 물론
러시아 황제 알렉산더 등 유럽 왕실과 지도자들을 위해 요리했고,
지금 우리가 아는 프랑스 요리는 물론 서양 요리의 맛과 모양을
확립한 인물이다. 카렘은 다양한 프랑스 소스를 큰 범주 4개로
분류했는데, 그가 정한 소스 체계는 여전히 서양 요리의 기본이다.
요리사의 상징인 토크(toque·높고 흰 모자)와 흰색 유니폼도
권위와 위생을 강조한 카렘이 처음 주방에 도입했다
-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노회한 외교관이자 까다로운 미식가였던 탈레랑은 매일 아침
한 시간씩 그날 먹을 음식들을 검토했다고 한다. 그는 음식과 접대가
얼마나 외교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프랑스의
운명이 달린 빈 회의에 그는 카렘을 데려갔다. 빈으로 떠나기 전,
프랑스 왕 루이 18세가 이런저런 주문으로 탈레랑을 귀찮게 했던
모양이다. 탈레랑은 왕에게 "전하, 저에게는 지시보다
냄비가 더 필요합니다. 제가 저의 일을 하게 하옵시고,
카렘을 믿으시옵소서" 하고 말했다.
빈 회의는 정식 총회가 열리지 않았다. 강대국 대표끼리
비공식적인 1대1 회담을 통해 사안 대부분을 논의하고 결정했다.
오늘날의 비즈니스 미팅도 그렇지만, 이런 회담에서는 어떤 음식과
술로 어떻게 대접하느냐가 특히 중요했을 것이다. 패전국인
프랑스로서는 협상을 유리하게 끌고 가려면 상대방을 기쁘게 하고
감동시킬 필요가 있었다. 카렘은 여기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지금도 유명 요리사의 음식을 맛보기 위해 먼 길을 마다하지
않는데,당시 유럽에서 가장 이름난 카렘의 요리가 나오는
탈레랑의 초대를 어떤 외교관이 거부할 수 있었을까.
이처럼 음식이 외교에 기여해 왔지만, 외교가 음식에 기여하기도 한다.
일본 음식이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얻을 수 있었던 건 일본 외교부의
노력이 컸다. 일본 정부는 일식(日食) 교육을 받은 요리사를 재외공관에
전속 요리사로 파견했다. 일본 대사관에서는 그 국가의 상류층 인사들을
초대해 일본 고유의 식재료를 이용한 음식을 대접했다. 이를 통해서
일식을 그 국가에 알리고 친숙해지게 했다. 일식 세계화를 위해
해외 각국의 일본 대사관을 전진기지로 삼았던 것이다.
한국 정부도 일본의 사례를 벤치마킹해서 한식 세계화에 활용하고 있다.
요리사들에게 한식을 교육해 해외 공관에 파견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유명 한식당의 요리사를 보내 한식을 홍보하는
행사를 열기도 한다. 탈레랑이 카렘이 만든 프랑스 요리로 프랑스를 구한
것처럼, 미국이 자국 요리사들을 외국에 파견해 미국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고 있는 것처럼, 한식이 한국의 외교를 돕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한국 대중음악과 영화·드라마에
이어 한식(韓食)이 해외에서인기를 빠르게 얻고 있으니
아마 곧 그렇게 될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