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재공 최수지(崔水智)의 손이며 문과 군수공 최이식(崔以湜)의 차자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첨사경력(僉使經歷)을 거쳐 김해 도호부사(종3품)를
지냈고 증손 최균과 최강 양공의 훈공으로 가선대부 병조참판에 증직 되었다.
경력(經歷:종4품)으로 있을 때 매계 조위(梅溪曹偉)와 더불어 점필재 김종직
(佔畢齋金宗直)선생을 배종하여 영남루에 모여 노닐 때 선생이 시를 지어
공을 칭송하였고 김해 도호부사로 있을 때 함허정(涵虛亭)을 지으니 좌의정
어세겸(魚世謙)이 정명(亭名)을 짓고 탁영 김문민공 일손(濯纓金文愍公馹孫)이
기문을 지었다.
동국여지승람 및 김해읍지에서는“ 함허정이 연자루 북쪽에
있는데 연산군 4년 무오(1498)에 부사 최윤신공(崔潤身公)이 짓고 호계(虎溪)
의 물을 끌어들여 연못을 만들고 그 가운데에 정자를 지으니 물은 맑고
깊었도다.“라 하였다.그리고 김일손(金馹孫)의 기문에서 ”부사 최후(崔候)는
대단한 재간을 갖추었다.이미 연자루(燕子樓)를 중수하였고 옛 문물을 빛나게
꾸미면서 쓰임새가 부족함이 없도다. 천지가 고요하여 바람도 자고 달도 밝아서
물이 하늘인가 하늘이 물인가 어세겸(魚世謙)이 이름을 함허정(涵虛亭)이라
불렀으니 최후(崔候)의 풍류 또한 비상함을 알리로다.“라 하였다.
조남명 식(曹南冥植)의 기(記)에 이르기를 “분성(盆城. 김해의 옛 이름)의
함허정에 모여 다섯 밤을 놀다가 그치니 비록 슬왕각(膝王閣:중국강서성
南昌에 있는 집으로 유명하다)의 모임이나 죽림 7현의 놀이가 이것보다 더
나음이 없으리라.“ 하였다
.
창원 대도호부사 계림 관은 박홍미(鷄林灌隱朴弘美), 정박원(鄭璞園).
염수 허염(髥須許焱), 동래부사 명연 류여각(明淵柳汝恪),지부 김건수
(知府金建銖)등 제공들이 함허정의 승경에 도취된 시를 남기고 있다.
김해 지리지에는“ 함허정은 지금의 동상동 연화사 자리에 있었던 정자인데
이곳의 연꽃에 이슬을 머금고 피어있는 아름다운 모습은 퍽 시적이었다.“ 고
하였다.(김해읍지. 세헌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