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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 내 (Gaenea)
世德叢覽(全州崔氏 按廉使公 宗會)

8. 주요인물(主要人物)-13) 인 물(人 物)-子逕(6世)-得逕-宗復-水智(7世)-水仁(7世)-[1]

by joolychoi 2012. 6. 11.

 

 

 

세덕총람 (世德叢覽) 

 

  8. 주요인물(主要人物)  
13) 인  물(人  物)-[1]
  자경(子逕 6世)
중직대부(中直大夫) 사복시정공(司僕寺正公) 최사필(崔斯泌)의 장남이다.
진사를 거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봉훈랑(奉訓朗:조선조종5품동반직)으로
개령(현경북김천시일부)현감을 지냈다. 증손 최응룡공(崔應龍公)의 귀로
숭록대부(崇祿大夫:從一品階)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 종 1품서반직)의
벼슬이 증직되고  처음으로 진주 강주촌(현진주시정촌면대축리한골)으로
이거 하였으며 사적이 진양지와 연계안(蓮桂案)에 등재되어 있다.
(진양지. 세헌록)
 

 

 득경(得逕 6世)
중직대부 사복사정(中直大夫司寺正)을 지낸 최사필공(崔斯泌)의 차남이다
호는 정재(靜齋)이고 조선 조 세종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영평군수와 형조
판서(正二品)을 지냈으며 생몰연대는 자세하지 않다.제단의 비석에는
고자헌대부형조판서와 완산최공(故資憲大夫刑曹判書完山崔公)이라 새겨져
있고  진주 죽곡의 화전산에 있다. (진양지. 세헌록)
(주) 영평군(永平郡) : 지금의 경기도 포천군)
 

 

 종복(宗復 6世)
최사강(崔斯江)의 자이며 현감공 최자경(崔子逕)과는 종형제간이다.
조선초기 문과에 급제하여 관(官)은 임금이 정사를 바르게 할 수 있도록 간쟁(諫諍)과
논박(論駁)의 일을 맡는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정6품직)을 지냈다. 사직 후에는
사천 죽천(泗川 竹川. 현 사천시 사남면 소재)에 거처를 정하여 더욱 천착을 닦으며
유유자적하게 세상을 마쳤다. 공에 관한 도의와 충의가 구전으로 전할 뿐 관련 문헌이나
유적이 없응 뿐 아니라 묘소마져 알 수 없어 후손 용환(鎔煥),칠룡(七龍)등이 주동하여
1999년에 덕석재(德席齋) 뜰에 제단비(祭壇碑)를 건립하고 2000년 1월 26일에
제단비 고유식을 거행한 후 현재까지 ㅡ10여년간 춘추로 단제로 제향하여
오고 있다.(세헌록. 최용환)
 

 

 수지(水智 7世) 

호는 검재(儉齋)이며 안렴사공 최용생(崔龍生)의 5 세손이다.일찍부터

경암허조(敬菴許稠)의 문하에서 스학하였다. 1453년 단종원년 계유에 진사로서

문과에 급제하고 이어 옥당(玉堂 : 홍문관의 별칭) 응교(應敎 : 정4품관)에

등용되었다. 그 후 자원하여 비직(卑職)인 비안현감(比安縣監 : 경북의성군 소재 현)

을 지냈다. 상서원정(尙瑞院正)으로 있을 때에는 중국 연경에 보내는 사신의

일원인 서장관으로 갔는데 명나라 황제로 부터 상으로 주자서안(朱子書案) 용연

(龍硯) 그리고 문장정종(文章正宗)이란 책을 받았고 이는 해평 차종가에서

소장하고 있다.(진양지. 세헌록)

 

 수인(水仁 7世) 
자는 윤전(潤田)이며 호는 낙헌(樂軒)이다. 공은 안렴사공 최용생(崔龍生)의
5세손이고 개령현감공 최자경(崔子逕)의 차자이다. 태종 16년 병신(1416)에
태어나서 재주와 학식이 훌륭했고 경세와 국방에 뛰어났으며 도교술도 아울러
능통했다. 세종 때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선공시 한성부 전의감(繕工寺漢城府
典醫監)등을 역임하였고 단종 원년(1453)에 단성현감(종6품직)을 맡게 되었는데,
앞뒤 여러 관직에서 모두 칭찬을 받았다. 단종이 폐위되자 관직을 버리고 산수 간을
소요하며 충성과 분함을 쏟아 내였으며 단성면 월명촌 백마산(丹城面月明村白馬山)
꼭대기에 집을 지어 귀락당(歸樂堂)이라 이름 짓고 은거하였다.(세헌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