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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대사 유정(四溟大師 惟政 )의 유적지 자료

by joolychoi 2011. 8. 10.

 

 

사명대사 유정(四溟大師 惟政 )의 유적지를 찾아서

 

표충비각 :  경남 밀양시 무안면 무안리(시도유형문화재 제15호) 의 무안초등학교 옆

 

사명대사(四溟大師) 비석의 특이한 것은 우리나라의 큰 경사나

난리가 있을 때마다 비석에서 땀이 흐른다는 것이다.  

 

표충비(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5호) 안내판

  이 비(碑)에는 사명대사의 업적과 영당비문 및 표충사(表忠寺) 사적비문이 새겨져 있다.

 

홍제사 :  경남 밀양시 무안면 무안리 표충비각 옆 사찰 뜰에 있는 3층석탑

 

사명대사비 : 밀양시 무안면 고라리 사명대사 생가터에 있는 비

 

사명대사 생가 터 안내판  

 

사명대사 생가 (경상남도 기념물 제116호) 

 

담장 너머로 본 사명대사 생가

 

사명대사 유적지 관광안내도

 

 

1. 사명대사 유정(四溟大師 惟政)의 어린시

사명대사 유정(四溟大師 惟政:1544,중종 39∼1610.8. 26,광해군 2)은

조선 중기의 고승으로서 풍천 임씨(豊川任氏)이며 속명은 응규(應奎)  

이고 자는 이환(離幻)이며 호는 사명당(四溟堂) 또는 송운(松雲)이고  

별호는 종봉(鍾峯)이며 경상남도 밀양 출신으로서 아버지는 수성(守成)

이며, 어머니는 달성서씨(達城徐氏)이다. 7세 무렵부터 할아버지에게  

사략(史略)을 배웠으며, 13세에 황여헌(黃汝獻)에게 맹자(孟子)를 배웠다.

 

 

2. 임진왜란 때 의승도대장으로  평양성 탈환 주역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의 근왕문(勤王文)과 스승 휴정의 

  격문을 받고 강원도 건봉사에서 의승병을 모아 순안으로 가서 휴정과     

합류하였다. 그곳에서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이 되어 의승병 2, 000명

을 이 끌고 평양성과 중화(中和) 사이의 길을 차단하여 평양성 탈환의  

전초 역할을 담당하였다.1593년 1월 명나라 구원군이 주축이 되었던   

평양성 탈환의 혈전 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그해 3월 서울

근교의 삼각산 노원평(蘆 原坪) 및 우관동 전투에서도 크게 전공을 세  

웠다. 선조는 그의 전공을 포장 하여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를    

제수하였다.

 

 

 3. 임진왜란 후 사신으로의 역할

선조의 부름을 받아 조정으로 가서 일본과의 강화를 위한 사신으로 

임명받았다. 1604년 8월 일본으로 가서 8개월 동안 노력하여 성공적

인 외교성과를 거두었고, 전란 때 잡혀간 3, 000 여명의 포로를 데리

고 1605년 4월에 귀국하면서 이때 왜군에 강탈당했던 통도사(通度寺)

의 석가모니 치아 진신사리 5과를 되찾아와 건봉사(乾鳳寺)에 안치했

다고 한다.

 

사명대사 유적지에 있으며 업적을 벽화한 것

 

사명대사 기념관

 

사명대사 동상

 

 표충사 : 밀양시 단장면 구천리에 있는사찰 대광전(경남 유형문화재 제131호)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사명대사의 충혼을 기리기 위해 고향인 밀양시
무안면에 세운 표충사 (表忠祠)를 옮기면서 가람배치가 크게 변하고 절

 이름도  현재 표충사(表忠寺) 로 바뀌었다 .

 

표충사 : 새명대사 유물관

 중요문화재로는 청동은입사향완(靑銅銀入絲香? : 국보 제75호)이 있다.

 

 

사명대사 석장비 (보물 제1301호) : 해인사 일주문의 왼쪽으로 약400m에

홍제암이 있고, 홍제암의 왼쪽에 있으며, 중앙에 있는 것이 사명대사 석장비 임. 

 

 

4. 사명대사 부도(四溟大師 浮屠)(보물 제1301호)

사명대사 부도는 홍제암의 북동쪽 약 20m 지점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석종형 부도로서, 11m x 24m의 대지 위에 길이 24m의 기단을 설치하고

 안쪽으로 다시 12m(현존길이)의 석축을 놓아 부도전을 조성하였다.     

 부도는 3.9m x 4.2m 크기의 탑구 내에 건립되어 있다.

 

 

5. 사명대사 석장비(四溟大師 石藏碑) (보물 제1301호)

사명대사 석장비는 대사의 일대기를 기록한 비석으로, 광해군 4년(1612)에 

세웠으며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이 비문을 지었다. 일제시대(1943년) 때,

비문의 내용이 민족혼을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다 하여 일본인 합천 경찰서장

이 네조각으로 깨뜨려 관사 댓돌로 쓴 것을 1958년에 다시 접합하여 세웠다.

 

 ** 자료출처 : 사명대사탑 및 석장비/ 문화재청 **

** 사진촬영 및 정리  : 白岩 金在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