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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 내 (Gaenea)
가족과 가정에 대하여

안렴사공 후손의 구전설화

by joolychoi 2007. 9. 9.

6世 판사공 諱.子涇의 配 晋州鄭氏

진사로 문과에 올라 봉훈랑(奉訓郞)으로 개령(현재:경북 김천시 개령면 동부동 서부동 일대) 현감을 역임하였으며 증손 응룡의 귀로 인하여 판사로 추정하였다. 사천에서 진주 강주촌(현재:진주시 정촌면 예하리)으로 移居하셨고 묘는 고성군 상리면 객방에 있으며 曾孫子인 응룡이 진주 목사로 있을 때 비문을 지어 묘지에 세웠다.

증정경부인은 진주정씨였는데 아버지는 교리 길방(吉邦)이였으며 묘는 진주 죽동면 한골(大洞) 서쪽 위에 있었는데 실묘하였다가 순조 갑신년(갑신년 순조 24년 1824년)에 ‘曾孫應龍謹撰’의 6자가 새겨진 片碣(비석의 한조각)을 얻어 묘소를 다시 찾고 이를 손질하였다. 맏아들은 수지(水智)이며 둘째 아들 장사랑(將仕郞)수인은 후손이 없고 증정경부인 진주강씨는 판사(判事) 천명(天命)의 딸이며 셋째 아들은 수용이며 해정공파의 선조이다.


※실묘 및 다시 찾은 내용의 口傳說話를 서술하면

합천이씨(불명) 집안이 득세하여 산 위에 묘를 쓰고 이묘    아래에 있는 모든 묘소(신씨,정씨등)의 비석을 파괴하였다고 전하여   지고 있으며.

180여년 전에 현재 진주정씨 묘 관리인의 증조부께서 사냥   을 하러 가다가 돌에 받쳐 미끌어져 그 돌을 확인한바 묘비   의 조각으로써 ‘증손응룡근찬’ 이란 여섯글자가 새겨져 있어   全州崔氏家門에 연락하여 진주정씨(諱.子涇의 配)묘소를 다   시 찾았다고 전하여 지고 있다.


8世 郡守公 諱.以湜

공은 문과에 올라 군수를 역임하였고 대를 이어 황갑(黃甲:높은벼슬)이었으니 남명선생집(南冥先生集)에서 대가(大家)라고 칭명(稱名)하였으며 함안(咸安) 안인리(安仁里)에 옮아 살았다. 맏 아드님 윤옥(潤屋)은 무후하였고 다음은 윤신(潤身)이었으며 그 다음은 윤재(潤才)요 또 그 다음은 윤종(潤終)인데 무후하였으며 따님은 변 윤종에게 시집갔다.

※일설에 의하면 儉齋公(諱.水智)께서 비안현감으로 부임하실 적에 우기라 비가 많이 와서 강물이 넘쳐흘러 가족과 함께 가지 못하시고 단신으로 부임지에 가셨으며 가족은 처가 곳인 咸安 安仁에 정착하게 되었다는 설이 전하여지고 있다.


9世 부사공 諱.潤身의 함허정

연자루의 북에 있으며 戊午(1484년 연산 4년)에 부사 최윤신이 짓고 호계의 물을 끌어들여 연못을 만들고 가운데에 정자를 지어 좌의정 어 세겸이 정자를 함허정이라 명명하였다.

1777년에 무너져 1801년에 다시 세웠으며 일제시대에 金海佛敎布敎堂(蓮華寺)으로 했다가 1970년 11월 화재로 소실되고 1975년 4월 蓮華寺를 重建하였다.

현재 위치는 경남 김해시 동상동 874-5번지에 있다.

공의 배위는 정부인 진양강씨인데 사직(司直) 수지의 따님이고 아드님은 入固城하신 潭이며 둘째는 泓인데 무후하였고 셋째 河는 참봉으로 문장과 절행이 있었다.


※일설에 의하면 근년에 함허정 현판이 김해 경찰서장(성명불명)이 갖고 있었다고 전하나 시간이 흘렸고 누구인지를 몰라 찾을 길이 막막함에 후손으로써 안타까운 마음 뿐이다.

11世 참봉공 諱.云傑

入固城하신 우윤공(諱.潭)의 장남이신 참봉공(諱.云傑)의 卒에 대한 口傳說話를 이야기하면.

광주노씨(공의 외삼촌)는 외아들이고, 공(諱.云傑)은 7兄弟中 長子이시다.

父親(諱.潭)이 돌아가시자 묘소예정지가 구만면 화촌마을 북서서쪽에 자리하였으나 풍수지리학적으로 보면 자손이 크게 흥하지 않는 자리라 하였으며 반면에

광주노씨(공의 외삼촌) 묘소예정지는 구만면 당산 독산인데 풍수지리학적으로 자손은 번창하나 장자가 삼우안에 卒한다 하여 광주노씨는 외아들로써 일찍 卒하면 안된다고 하니 공(諱.云傑)이 말하기를 내 형제가 7형제이고 가문과 자손이 흥한다면 내가 죽더라도 가문을 위하여 부친(諱.潭)을 당산독산으로 모시겠다고 하여 광주노씨(공의 외삼촌)와의 묘소 예정지를 서로 바꾸도록 하였다.


진실로 부친(諱.潭)을 장사지내고 그 삼우일에 장자인 참봉공(諱.云傑)은 사망하였으며 묘지는 부친(諱.潭)의 좌(東쪽)편에 있다.

長女는 이세염(李世廉)에게 출가하여

그의 아들 達(雲圃公)은 의민공 의숙공과 함께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참가하였고 후에 도산서원에 배양하여 의민공 의숙공과 함께 배양하였으나 후에 고성읍 우산리로 모시고 갔다.


이상과 같이 우리집안은 공(諱.云傑)의 살신성인으로 인하여 자손이 흥하고 번창하며 가문이 빛나게 되었다고 전한다.


12世 의민공 의숙공 출생예언 및 鳳陽齋

선시(先是)에 증형조판서이신 판서공(諱.云哲)께서 구만면 곤계봉 아래에 집터를 정하고 개기(開基)를 하니

시주 나온 한 스님이 말하기를 “상량 시(上樑時)를 놓치지만 않는 다면 틀림없이 당대에 기특한 두 아들을 얻으리라” 함으로 그 때를 물었던 바

“내일 쇠갓을 쓴 계집아이가 남쪽에서 올 것인데 그 때라” 고 하였다.

과연 이튿날 한 계집아이가 쇠솥 뚜껑을 이고 오자 기이한 일이라 이 때를 놓치지 않고 상량을 하였다.

공이 중종 32년 정유(1537년)에 태어나니 인물이 뛰어나고 풍채가 엄숙하여 품성이 순박하고 인정이 많았으며 효성과 우애가 타고난 천성이었다.


현재에도 구만면 낙동마을 후편 곤계봉 아래에 생가터와 우물(물이나는 곳)이 있어 옛 정서를 후손에게 전하고 있다.

(현재 의숙공(諱.堈)파 종손의 소유로 되어 있다.)


鳳陽齋(의민공묘각, 회화면 당항소재)의 대들보(장보)를 회화면 삼덕리 남진마을의 정씨집안 죽전(대밭) 가운데에 있는 느름나무로 정하여 벌목하였으나 밀어도 나무가 넘어지지 않아서 술과 약간의 제물을 준비하여 고유하며 “나무야 나무야 느름나무야 네가 소호 의민공의 재실(묘각)의 대들보가 될 것인데 넘어지지 않으면 어떡하란 말이냐” 하니 나무가 넘어져서 鳳陽齋 건립을 원활히 진행하게 되었으며 지금도 鳳陽齋의 대들보(장보)는 곰팡이가 핀 것처럼 흰색으로 나타나고 있다.

공의 배위인 정부인 진양정씨는 진사 관(寬)의 딸이고 네 아들을 두었다. 아들은 興虎, 山虎, 起虎 이고 振虎는 김천찰방이다. 興虎는 洽과 洪의 두아들을 두었는데 洪은 찰방이며  振虎는 廉, 濈, 燠, 澲, 洸의 다섯아들을 두었다.

정부인 진양강씨의 묘소는 고성군 하이면 사곡(모래실)에 있다.


13世 찰방공 諱.振虎의 配 칠원제씨

고성군 대가면 척곡박달의 친정 곳 선산중앙에 칠원제씨의 순절묘가 있다.

칠원제씨는 찰방공(諱.振虎)과 혼인하여 신행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공은 의병으로 참전하였으며 칠원제씨는 친가에 머무르고 있을 때,

마을 어귀에서 말발굽소리가 들려 서방님(諱.振虎)이 처가에 오시는 줄 알고 그립고 반가워하는 마음에 마중을 가려 하나 양반집 규수로 자란 몸이 서방님 오신다고 마을 어귀로 갈 수가 없어 대신하여 물동아리를 들고 우물에 물을 뜨러 가니 마을 어귀에서 난 말발굽소리는 서방님(諱.振虎)이 아닌 왜놈의 장수라 급히 물을 길러 돌아오려고 하니 왜놈이 말을 탄 채로 다가와 가슴을 추행하고 지나가니 제씨 할머님은 바로 친정에서 은장도로 자진하여 순절하였다고 전한다.


고성읍지에 따르면 “諱.振虎의 配 칠원제씨는 임란 때 순절하였다” 라고 되어있다.

                                       2007.4

                     농산친목회          總務 崔 晳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