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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 내 (Gaenea)
가족과 가정에 대하여

안렴사공 파조부터 입 고성 선조까지의 내력

by joolychoi 2007. 9. 9.

파조부터 입고성 선조까지의 내력


안렴사공파 파조 - 고려 경상도 안렴사 안렴사공 휘용생. 

안렴사공(按廉使公)은 전주최씨 문성공계 시조(始祖) 문성공 최아(文成公 崔阿)의 큰아들로 휘(諱)는 용생(龍生)이며 충정왕2년 (서기1350년 2월)지평 벼슬을 하시다가 경상도 안렴사(按廉使)가 되었다.

성품이 강정염직(剛正廉直)하며 스스로 검약할 뿐 아니라 총명함이   비할 곳 없이 뛰어 났으며 경서와 사기를 전수하여 익혔다.

어러서부터 학문을 좋아 하시고효제지심이 두터웠다.

국가고시인 문과 대과에 급제하고 벼슬에 오르시자 민생과 민권에 힘쓰었으며 주체의식이 강하였다

고려사에는 경상도 안렴사 최 용생이 궁중의 내관으로부터 미움을   샀는데 그것을 내관들이 원나라의 총애만 믿고 못된 짓을 저질러서   그 해(害)가 백성에게 미치므로 그 나쁜짓을 백성에게 들내서 성토하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고려는 원나라(元)의 속국(屬國)으로 해마다(每年) 어린 소년 소녀들을 붙잡아 원나라에 조공(朝貢)으로 바치고 있었고 이렇게 고려에서 원나라에 조공된 사람들은 대부분 원나라 귀족(貴族)이나 관료들의 종복(從僕)으로 살아가게 되었지만 그 중 일부는 원나라 황실(皇室)의 내시(內侍)가 되기도 하였는데 특히 기씨(奇氏) 여인(女人)은 원나라 황제의 눈에 들어 황후(皇后)가 되기도 했다.

그로 인하여 기황후(奇皇后)의 오빠 기철(奇轍)을 비롯한 원나라의   총애를 받는 내시 무리들의 고려에 남아있는 가족들은 고려 정권의  실권(實權)을 장악하고 많은 폭정(暴政)을 휘둘렀다. 

이런 상황에서 안렴사공은 원나라 내시들과 연결된 고려 조정의 간신(姦臣)들의 죄를 낱낱이 들추어 전국에 방을 붙여 세상 사람들에게   폭로(暴露)하였다.

이에 내시 주원지(朱元之)가 왕(王)에게 참소 하여 안렴사공을 파직하여 경상도 사천으로 귀양가게 하고 김유겸(金有謙)에게 경상도 안렴사를 대신하게 하였다. 이로 인하여 안렴사공의 후손들은 경상남도 지역을 중심으로 살게 되었는데 후손은 주로 진주를 비롯한 경남 서부지역에 많이 살고 있으며 이들을 전주최씨 안렴사공파라고 부른다.

묘는 사천군 정동면 풍정동 간좌에 있었으나 잃어버러서 옥산재에   設壇하여 享祀 한다.(玉山齋는 사천시 정동면 풍정리에 소재 하고 있으나 2004년에 경상남도 고성군 구만면 화림리 당산에 신축 이전 하였음.)  단을 세워 해마다 제사를 모신다고 하였다.

맏아들 군보는 후손이 없고. 둘째 아들은 전우(田雨)이며. 딸은 조선조 개국공신 보성군(寶城君)오 몽을(吳 蒙乙)에게 시집갔다.

안렴사공의 큰아들은 최군보(崔君甫)로 후손이 전해오지 않는다.

작은아들 최전우(崔田雨)는 판도 정랑을 지냈으며 후손이 경남 고성군 구만면에 집성촌(集姓村)을 이루고 살고 있는 것을 비롯하여, 산청군, 하동군,남해. 사천시, 통영시. 고성군. 그리고 경북 구미시 등지에 많은 세대가 살고 있다.    

                     안렴사공파 세대

2세----------3세----------4세--------5세---------6세------------7세--------

최용생(崔龍生)-최전우(崔田雨)-최택(崔澤)-최사필(崔斯泌)최자경(崔子涇)--최수지(崔水智)

-------------------------------------------------------------최수인(崔水仁)

-------------------------------------------------------------최수용(崔水勇)

----------------------------------------------최득경(崔得涇)---최효랑(崔孝良)

-------------------------------------------------------------최효문(崔孝文)

----------------------------------최사강(崔斯江)-최종복(崔宗復)--최승로(崔承魯)

※ 참고 : 안렴사공파는 파대종회의 관리를 위한 중파(中派)를 시조 문성공 13세를 기준으로 하여 무과공파. 통덕랑공파. 완헌공파. 화헌공파. 찰방공파. 소연공파. 의숙공파. 학생공파. 처사공파. 대은공파. 묘재공파. 참봉공파. 학생공파. 충순위공파. 석문공파. 인재공파. 월담공파  선무랑공파. 봉사공파. 학생공파. 참봉공파. 송정공파. 낙헌공파. 해정공파. 동지중추공파. 현감공파. 죽당공파  모산공파. 부사공파. 참봉공파. 통헌공파. 진사공파. 정언공파로 나누어 중파로 관리한다. 


판도정랑(版圖正郞) 휘 전우(諱 田雨)

시조 문성공3세의 휘는 전우이며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이 판도정랑에 이르렀으며 아들은 택이다. 휘 전우 묘는 실묘하여 경남 고성군 구만면 화촌 소재 도산서원에서 단제를 묘시다가 2004년부터 구만면 당산 소재의 옥산재에 壇享 한다. 子는澤 이다.


복창원위전(福昌院衛典) 휘 택 (諱 澤)

시조 문성공4세의 휘는 택이며 벼슬이 복창원위전에 이르렀다.

묘는 실묘하여 경남 고성군 구만면 화촌 소재 도산서원에서 단제를  묘시다가 2004년부터 구만면 당산 소재의 옥산재에 壇享 한다.

맏아들은 사필(斯泌)이고. 둘째아들은 사지(斯沚)이나 후손이 없고 .  셋째아들은 사강(斯江)이다.


사복시정(司僕寺正) 휘 사필 (諱 斯泌)

시조 문성공5세의 휘는 사필이며 조선조에 들어와서 문과에 급제하고 중직대부 사복시정을 지냈으며 형제를 두었으니 맏아들은 자경(子涇)이며. 둘째아들 득경(得涇)은 문과에 급제하여 군수를 지내고 형조 판서를 지냈다.

득경의 5세손인 기필(琦弼)의 호는 모산(茅山)이니 진주 판관을 천수하였고. 계사년에 촉석루 아래에서 순절하였는데 병조참의의 증직이   내리고 창열사( 彰烈祠)에 향사하였다.

기필의 조카인 탁의 호는 죽당인데 익위사 익찬을 지내고 절개와 의리가 뛰어나서 좌승지의 벼슬에 증직되고 인계서원에 향사되었다.


숭록대부(崇祿大夫) 휘 자경(諱 子涇)

시조 문성공6세의 휘는 자경이며 진사를 거처 문과에 급제하여 봉훈랑으로 개령 현감을 지냈다.   증손자인 응용(應龍)의 귀로인하여 판사의 벼슬이 증직돠고 처음으로 광주촌에서 살게되었으며 3대가 잇따라   진양지에 실렸다. 묘는 고성군 상리면 객방 간좌에있고 증손자인 응용이 진주 목사로 있을 때 비문을 지어 묘비를 세웠다.

증 정경부인 진양정씨는 교리 길방(吉邦)의 딸이며. 묘는 사천군 축동면 한골(大洞)서쪽 위에 있었는데 실묘 하였다가 순조 갑신년(AD.1824)에 “증손 응용 근찬”(曾孫 應龍 謹撰)의 6자가 새겨진   비갈 조각이 나와서 묘소를 다시 찾고 이를 손질 하였다.

맏아들은 수지(水智)이며 둘째아들 장사랑(將仕郞) 수인(水仁)의 맏아들은 장저(長著)이고 둘째아들은 차저(次著)이나 후손이 없다. 

증 정경부인 진양 강씨는 판사 천명(天命)의 딸이며 셋째아들인 수용(水勇)은 훈련원 참군을 지냈다.

※실묘 하여 다시 찾은 증 정경부인 진양 정씨의 口傳說話는

합천이씨(불명) 집안이 득세하여 산 위에 묘를 쓰고 이묘 아래에 있는 모든 묘소(신씨,정씨등)의 비석을 파괴하였다고 전하여 지고 있으며.

180여년 전에 현재 진양정씨 묘 관리인의 증조부께서 사냥을 하러  가다가 돌에 받쳐 미끄러져 그 돌을 확인한바 묘비의 조각으로‘증손응룡근찬’이란 여섯글자가 새겨져 있어  全州崔氏家門에 연락하여  진양정씨(諱.子涇의 配)묘소를 다시 찾았다고 전하여 지고 있다.


예문관 직제학(藝文館 直提學) 휘 수지 (諱 水智)

시조 문성공7세의 휘는 수지이며 자는 윤보이고 호는 검재(儉齋)라  하였으며 경암 허주의 문인으로서 문장과 의(義)를 행함이 당대에 뛰어났었다. 일찍이 사마시에 합격하고 또 계유년(AD. 1453 단종1년)문과에도 급제하였는데 그 때 성상문이 수석 시험관 이였다. 전한 옥당  응교를 거쳐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 사신으로 갔는데 명나라의 황제가 그 뛰어난 글과 재능을 가상히 여겨서 독대하고 주자수서인 수조가를 패각한 주자서안(朱子書案)과 문장정종(文章正宗) 그리고 용연(龍硯)을 상사품으로 주었는데 이것은 지금 가보로 전하여 지고 있다.

선산읍지에 보면 지방관으로 보내줄 것을 청하고 “내가 나이가 많아서 건강을 돌보아야 하겼다”고 조정에 주청 하여 현풍 비안현감에  제수 되었고 성종조에는 좌리원종공신인 김 영달(金 英達)의 손서가  되어 명승지 해평의 강산을 벗삼아 지내다가 향년90세에 이르러서   세상을 떠났다. 손자 응용의 귀로 인하여 통정대부 승정유도승지 겸 경연 참찬관과 춘추관 수찬관 그리고 예문관 직제학을 증직 받았으며 묘는 선산 조계산 오리동 간좌에 있다.

증 숙부인 함평 모씨는 사인 순의 딸이며 아들 이식(以湜)을 낳았다.

증 숙부인 해평 김씨는 교도 유사의 딸이며 산소는 공의묘 바로 아래에 있다. 아들은 이회로 사복시 주부였으며 다음 아들은 이하이고 그다음 아들인 이한은 정주 교수를 지냈다.

큰딸은 생원 김영수에게 시집가고 들째딸은 생원 김 준에게 시집갔다.

이한의 아들 응용의 호는 송정이며 진사로서 문과에 급제하고 형조  참판에 올랐으며 퇴계선생의 문인으로 송산 서원에 향사 되었다.

이회의 증손자인 현은 호가 인재이며 진사로 문과에 급제하여 부제학을 지내고 학봉 김 성일과 한강 정구 선생의 문인이였다. 좌찬성의  벼슬을 증직받고 완산군으로 봉하였으며 정간공의 시호를 받았고 송산 서원에 응룡과 병향 되었다.

현의 아들 산휘는 호가 낙남이고 부사로서 영사훈에 책봉되어 완해군에 봉하였고 효헌공의 시효를 받았다. 


시조 문성공 8세의 휘는 이식(以湜)이며 문과에 급제하고 군수를 지냈는데 대대로 관장(官長)이 잇달았으므로 남명 조식선생의 문집에서는 명문 대가라고 기록하였으며 함안군 산인면 안인리에 이사하여 살았다.  휘 이식 묘는 실묘하여 경남 고성군 구만면 화촌 소재 도산서원에서 단제를 묘시다가 2004년부터 구만면 당산 소재의 옥산재에 壇享 한다.

맏아들 윤옥은 후손이 없었고 둘째 아들은 윤신이며 셋째아들은 윤종인데 후손이 없고 넷째 아들은 윤재이다. 딸은 변 윤종에게 시집갔다.

※일설에 의하면 儉齋公(諱.水智)께서 비안현감으로 부임하실 적에   우기라 비가 많이 와서 강물이 넘쳐흘러 가족과 함께 가지 못하시고 단신으로 부임지에 가셨으며 가족은 처가 곳인 咸安 安仁에 정착하게 되었다는 설이 전하여지고 있다.


부사공 휘 윤신(潤身)

시조 문성공 9세인 諱 潤身은 武科에 급제하여 도총경력 (都摠經歷)을 거쳐 金海府使가 되어서 燕山君 三年(一四九七年)에 함허정(涵虛亭)을 지으니 서천(西川) 어상공(魚相公) 세겸(世謙)이 명명(命名)하였다.

일찍이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을 따라 영남루(嶺南樓)에 올랐더니 선생이 그 승경(勝景)을 기념하여 시(詩)를 주어 이르기를, “승지(勝地)가 도리어 승인(勝人)에게 부칠 만 하네”(勝地還應屬勝人)또는 뛰어난 명승지는 뛰어난 사람한테 속하도록 돌려야 한다 하였으니, 公을 중(重)히 여겼기 때문이다. 

燕山君 四年 (1498年) 戊午士禍直前에 탁영(濯纓) 김 문민공(金文愍公) 일손(馹孫)이 놀러와서 함허정기(咸虛亭記)를 지으니 대략 이러하다.

김관(金官:김해)에는 사람이 생각 할 수 없는 기이한 자취가 많으니 최후(崔侯)가 대단한 재간(才幹)으로 연자루(燕子樓)를 말끔히 새로 꾸며 모든 문물(文物)을 분식(賁飾:좋게 꾸밈)한 바 그 쓰임새에 부족함이 없도다.

연자루(燕子樓)의 北쪽 파사탑(婆娑塔) 南에 네모난 연못을 뚫고 호계(虎溪)의 물을 끌어들여 물이 돌아나가는 곳에 가도(假島)를 쌓고 물결 中心에 臺를 하고 집을 얽으며 그 위에 띠풀을 심고 亭子의 물결을 가로질러 길을 내고 이에 고기를 기르고 연꽃을 심으며 各種 물새를 벌여놓아 떴다 가라않았다 하도록 하며 조그만 배에 기생과 풍악을 실어, 中流에 삿대질하며 부르는 노래나, 배 띄우는 노래를 부르게 하니 崔 府使는 사람들이 보기에 水仙 같더라.

홍치 무오 중하(弘治戊午仲夏)에 府使가 나를 성 중(城中)으로 맞아들여 소위(所謂) 涵虛亭을 관람시키며 記文을 쓰라 하여 사양하였더니 사양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즉 府使에게 청하여【멀리 기록하겠습니다.】하니【 그러시오 】한다.

물의 성품은 두루 흘러 막힘이 없으며 체(軆)는 본디 허(虛) 하며 虛한 고(故)로 능히 물건에 물배어(涵物) 한편으로는 웅덩이나 길바닥에 흐르는 탁류(濁流)라도 능히 마름풀을 띄우며 잡목(雜木)도 그 흐름에 띄우나 그 성품을 막으면 어찌 능히 물배어 그렇게 되겠느냐? 대개 사람의 일심(一心)을 쓰면 움직여 무궁하고, 軆하면 본디 虛하여 虛한 고로 五德을 갖추어 萬物에 대비하니 天地 日月이 다 내 마음 속의 물건이다.

亭子에 오르니 그 물의 맑기가 거울과 같았다. 천기가 고요하며 바람도 자고 달도 맑아서 물이 하늘인가 하늘이 물인가 魚 世謙이 이름을 涵虛亭이라 불렀으니 崔 府使의 풍류 또한 비상함을 알지로다.  그대에게 청하건대 말없이 앉아서 조용히 사물을 바라보면 마음도 맑아지고 근심도 사라지리라, 그 바탕이 텅 비어버릴 것이니 그대 마음속에 하찮은 찌꺼기가 쌓일 수가 없으리라. 涵虛亭 연못에 고기가 뛰노는 요긴한 이치를 가히 깨달을 수가 있도다.


또 금능(金陵)八景을 읊은 詩 가운데 함정로우(涵亭露藕)의 詩를 紹介하면 네모진 연못과 반이랑쯤에 외로운 亭子세워 푸르름이 흰 房을 덮고 뜰에 가득 차구나, 아름다운 모습과 그윽한 香氣가 함께 뜻이 있는데 밤중에 빗소리 으슥한 것이 가장 가인하도다.

涵虛亭은 그 후 몇 차례에 걸쳐 重建하였으며 남명 조식 선생(南冥曺植先生)의 記文과 多數人의 詩가 邑誌에 실려있으며 日帝時代에 金海 佛敎 布敎堂(蓮華寺)으로 했다가 1970年 11月 火災로 燒失되고 1975年 4月 蓮華寺(☎ 055.336.3046)로 重修하여 현재에 이르며 위치는 金海市 東上洞 洞事務所 前에 있으며 金海市場(옛연자루자리) 後便에 있고 石橋(蓮華寺內 涵虛橋)와 八角주춧돌(함허정주춧돌) 1개만이 옛 情緖를 그리며 傳하여 지고 있다.

정부인 진주강씨는 사직(司直) 수지(秀之)의 딸이며 생원 임생(任生)의 손녀이다.

맏아들은 담(潭)이요. 둘째아들은홍(泓인)데 자손이 없고 . 셋째 아들은 하(河)인데 참봉으로서 문장과 절도있는 행실이 뛰어난 데가 있었다. 딸은 권응장(權應章)과 노숙광(盧淑匡)에 출가 하였다




儉齋公(諱.水智)부터 入固城(諱.潭)까지


시조 문성공 7세 검제공. 8세 군수공. 9세 부사공 부자에 대한 시대적 사항 및 살아오신 내력을 유추하여 생각 하면 아래와 유사 할 것이다. 


五百五十年前 儉齋公께서 海平에 入鄕하신 사정 및 四代에 걸쳐 은거하신 내용을 살펴보면 시대의 변천과정에서 全州에서 泗川으로 다시 晋州 康州村(현재.진주시 정촌면 예하리)으로 康州村에서 또다시 儉齋公께서는 海平으로 入鄕하시고 長子이신 郡守公은 咸安으로 移居하시었으니 그동안 後孫들에게 남겨둘 신빙성 있는 기록들이 보전될 수 없었다.

文成公이후 六世에 이르기까지 모두 大科에 급제하는 희귀한 영광을 누리었으나 李朝에 들어와서는 관직은 한결같이 미미하였으며 다만 儉齋公께서는 경암 허주(敬庵許椆)의 文人으로서 문장과 의(義)를 행함이 당대에 뛰어 났었다 일찌기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또 경태(景泰) 癸酉年 端宗1年(AD.1453)에 文科에도 급제하였는데 그때 성삼문(成三問)이 수석시험관이었다.

玉堂應敎 北京使臣 書狀官등의 李朝官制로 보아 에리트 코스에 進入하시었으나 3年만에 六臣이 처형당하는 참경이 벌어졌으며 그 후 벼슬의 승진이 없었고 말직인 比安縣監으로 벼슬길을 끝내시었다.


端宗廢位時에는 三十七歲 전후였을 것이니 海平에서 가정을 이루시어 정착하실 대까지는 상당한 세월의 공간이 있었고 그 후는 세상과 牟氏할머님 친정 집을 멀리하셨고 은거하시었음이 역역하다.


여기서 당시 牟氏할머님의 친정 집의 家狀을 살펴보기로 한다.

文獻에는【咸平人 牟 恂(儉齋公의 장인)은 1417년 (太宗朝)에 文科에 급제하고 議政府 舍人을 거쳐 陜川郡守에 재임 시는 선정을 베풀어 명성이 자자하였으며 父母에 대한 孝誠은 지극하였다】하고【世祖가 王位를 찬탈하고 恂에게 詩를 지어보내 자신을 따르도록 회유했으나 끝까지 절개를 굽히지 않아 晋陽郡 寺奉面 登巾마을로 유배하였다】 라고 기록되어있다. 


그리고 있을법한 追贈이나 子孫에 관한 기사는   이례적으로 전무하나 儉齋公 父子는 牟氏 家門의 영향을 심각하게   받았을 것이다. 

牟氏할머님은 文科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있었던 아들(諱.以湜)을 데리고 친정 곳 咸安으로 移居하신 후 아들에 대한 기록은 전무하며 四代에 걸쳐 은거하였음이 족보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동안 配位不明 墓所失傳 등이 數多하였으며 儉齋公의 長孫인 諱. 潤玉의 配位咸平牟氏가 역시 諱 恂의 孫女이고 無后하였다는 譜의   기록과 次孫 諱. 潤身이 文科아닌 武科에 급제함으로서 家門의 전통에서 벗어났다는 사실 등이 當時에 있었을 무슨 曲節을 자손들로 하여금 생각해 보게 한다.


上記 내용을 推定하여 보면 儉齋公(諱 水智)께서는 進士를 거쳐 大科에 급제하시어 中年에 正四品의 벼슬을 지내셨으나 그 후 벼슬의 승진이 없었으며 말직인  縣監으로 벼슬길을 끝냈셨습니다.


府使公(諱 潤身)은 비록 武官職에 급제하였으나 家門의 전통을 이어받아 文에 능하여 김종직(刑曹判書) 어세겸(左議政) 김일손(吏曹正郞) 등과 같은 宰相 및 文章家와도 交流가 있었으며 嶺南學派인 士林派와도 많은 관계가 있었으리라 확신 할 수 있다.


燕山君 四年(1498年)에 戊午士禍가 일어나 그 우두머리로 김종직이  지목되어 剖棺斬屍를 당하였으며 首弟子인 김일손은 死刑 당하고 左議政인 어세겸은 罷職 당하였으며 勳舊派에 의한 士林派의 彈壓이 있어 士林派의 많은 人事들이 死刑 당하고 流配되었으며 罷職되었다.


이러한 사실에 根據하여 볼 때 府使公께서도 크나큰 어려운 난관이  있었으리라 사료되며 長子인 諱.潭도 咸安이나 金海方面에 居住하지 못하고 妻家 곳인 固城으로 入鄕하신 것으로 推定 할 수 있다.


漢城右尹公(諱.潭)의 孫子 義敏公(贈 吏曹判書) 義肅公(贈 兵曹判書)  兄弟가 壬辰亂 때 倭敵과 싸워서 一等의 功을 세움으로서 비로소 다시 家運을 일으켜 세웠고 그 후 자손은 固城一帶에서 크게 번창하였고 현대에 와서는 명문대가로서 더욱더 번창하고 있다.


                                           2007년1월

               

        전주최씨 시조 문성공 대종회  총무 최 석 림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