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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동래읍성 탐방기

by joolychoi 2006. 12. 4.

구수한 사람들 틈에서 출발한 동래읍성 답사

 

제법 쌀쌀한 날씨에 코트를 걸치고 애지중지하던 작은 수동필름카메라를 챙겨들고, 흐린 날씨를 걱정하며 동래읍성 답사의 출발지인 동래시장으로 향했다. 으래 문화유적답사 하면 문화재만 둘러보는 걸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하지만 북적이는 사람들 틈에서 답사를 시작하고 보면 그저 길가에 방치된 듯 보이는 초라한 문화재에서도 작은 민초들에 의한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느껴볼 수 있다.

 

동래읍성은 6년전에 처음 발견(?)한 뒤로 거진 한 달에 3~4번씩 방문하는 곳이 되어버렸다. 집에서 20분만 가면 되는 가까운 곳이기도 하지만, 우리역사를 가까이서 느낄 수 있어 자주 찾았다. 오늘은 풍물패에 장구강습을 하러 가는 도중에 가뿐한 마음으로 동래읍성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구수한 고기냄새, 상큼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청과물 가판대,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수를 맛있게 먹는 분식집의 사람들, 흥정하는 아주머니와 손이 부르튼 장사치들... 사람냄새 지독히도 가득한 시장통을 관통하여 옛 동래부의 핵심이었던 동헌으로 향했다.

 

 

동래부동헌 전경- 동래시장 한편에 초라하게 자리하고 있는 동래관아의 유적이다. 

 

철거당하고 뿔뿔이 흩어진 동래부동헌 건물들

 

동래부동헌은 동래부사가 직접 공무를 처리하던 곳이다. 지금은 시장의 북적함 속에 도시의 섬처럼 초라하게 남아있는 동래부의 동헌은 충신당과 동익랑 두체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대문, 외대문 이었던 동래도호아문東萊都護衙門(망미루望美樓), 독진대아문 獨鎭大衙門은 일제에 의해 금강공원으로 옮겨져서 이산가족이 되어 버리고 나머지 건물은 모두 철거당했다.

 

충신당 내부는 근대를 거치면서 변형되어 텅 비어버렸고 지금은 옛 동헌 모형과 각 건물현판, 고지도 등을 전시하고 있었다. 옛날 부산의 심장부는 이렇게 독진의 위엄을 잃고 초라하게 남아버렸다.

 

도심의 섬 장관청

 

동헌을 나서서 서쪽으로 직진하면 길이 도드라진 곳이 있는데 이곳이 서문터이다. 일제의 시가지 계획으로 동래읍성의 평탄면 구간은 거의 완전히 철거되고 집들이 들어섰다. 서문터 옆의 작은 골목으로 들어가면 성벽의 일부가 주택가 담장의 한 부분으로 남아 있다. 다시 발을 돌려 성 안으로 들어서면 주택가 사이에 장관청이 둘러 쌓여 있다.

 

조선후기 군교軍校들의 집무소인 장관청은 남아있는 몇 안되는 관아건물 중 하나인데 그나마 수차에 걸친 심한 구조 변경과 무리한 맞춤, 이음으로 원형이 많이 변형되 97년 해체, 복원하였다. 하지만, 해체, 복원한지 10년도 안되었는데, 건물 곳곳이 벌어져 엉망이다.

 

장관청을 지키고 계시던 기영회 소속의 할아버지께서 필자를 반갑게 맞아주시면서 자료를 주시며 설명도 해주셨다. 할아버지 왈 분명, 복원공사 할 때 공사비를 횡령 한 게 분명해!! 이 나라 공무원들 문제가 있어 하시는 것이었다. 당시 복원한 성곽 중 북문근처 구간이 여러 번 무너졌던 신문기사를 기억하니 분명 문제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씁쓸한 마음을 뒤로하고 장관청을 나와서 동래구청사 근처 옛 하천 유적이 시멘트로 덮히는 공사현장도 둘러보았다. 조선시대 것이 분명한 큼직한 돌들과 그 바로 옆에 이어지고 있는 시맨트하수도 유적(?)은 친근감을 뽐내며 어울리지 않게 붙어 있었다. 사진을 몇 장 찍은 뒤 동래부동헌 뒤쪽의 송공단에 들렀다.

 

충신의 영령을 달래는 송공단

 

송공단은 임란때 전사한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공과 순절의사들을 모신 제단이다. 원래 남문 밖 농주산(동래경찰서자리)에 있다가 영조때 임란 당시 공이 순절한 정원루가 있던 현재의 자리로 옯겨왔다. 송상현 부사는 죽을 각오로 성을 지키다 죽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부산시민에게 충신으로 각인되어 있으며 동래읍성역사축제에서도 그 고사를 각색하여 축제의 절정을 장식하기도 한다. 당시의 역사에서 우리는 수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교훈을 다시금 되씹으며 임란 당시 순절한 충의지사들에게 명복을 빌고 복원되어 있는 동래읍성으로 향했다.

 

산악에만 남아있는 조선후기 동래읍성

 

현재 조선후기에 쌓은 부분만 남아있는 동래읍성은 동래고등학교 뒤편 충렬사구간, 인생문과 마안산의 구간즉 북장대, 북문, 서장대로 해서 산악지역에만 남아있다. 동래읍성은 고려 때에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망미동 일대에 축성한 것을 1447년(세종29) 에 지금의 동래 시장 일대에 옮겨 높이 13척, 둘레 3,090척에 이르는 성으로 개축한 것이다.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1731년(영조7) 에 다시 확장·보수한 것이 지금에 이른다. 성의 둘레는 1만7,291척, 높이 17척이었다고 한다.

 

학소대를 지나쳐 복천동고분군을 빙 돌아들어 인생문에 올랐다. 복원한지 얼마되지 않아 하얀빛이 눈부시다. 성곽의 흔적을 짚어 3.1운동기념탑이 있는 곳을 돌아서 북장대에 거친 숨을 거듭 몰아 쉬며 올라서니 동래고을은 물론 멀리 좌수영 앞바다의 광안대교까지 보였다. 탁 트인 시야만큼이나 열려버린 가슴을 내밀고 숨을 크게 들이 마셨다. 습한 공기와 함께 짙은 구름들이 빠르게 움직이며 멀어졌다.

 

 

동래읍성 북문 - 복천박물관 뒷쪽에 남아있는 조선후기 동래읍성의 일부이다.

 

계속 흐리던 하늘에서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해서 서둘러 산길을 내려갔다. 북문에 내려서니 얼마 전 완공된 북문광장과 역사관이 위용을 드러냈고, 성곽을 따라 계속 걸어 서장대에 도착했다. 현재 복원된 성곽은 옛 것과 현대의 것이 정말 확연히 구분되며, 부조화 그 자체를 몸으로 표현하고 있다. 서장대 아랫쪽 성곽터는 예산이 부족한지 발굴하던 유구가 그대로 노출되어 몇 달째 방치되고 있었다. 발굴터 안에는 탐방객들의 것으로 보이는 발자국이 깊게 찍혀있고 땅속에 묻혀있다 드러난 성 돌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방치되고 있었다. 능선을 따라 더 밑으로 향하니 발굴조사가 끝났는지 흙을 그대로 덮어 놓고 포클래인이 한 달째 그 자리에 서있는 모습이 보였다. 계속 보아오던 모습인데다 비까지 내리고 있어 재빨리 동래향교로 내려갔다.

 

마안산 성곽 따라 산기슭에 자리한 동래향교

 

빗발이 제법 굵어지기 시작하여 동래향교 뒤편 돌담길에 들어섰다. 사진을 몇 장 찍고 동래향교 앞으로 내려갔다. 오후 5시가 다되어 가는 즈음이라 혹여나 문을 닫지는 않았을까 걱정 하였지만 아직 개방하는 시간이었다. 한양의 성균관을 축소해 놓은 것 같은 향교는 인적 없이 고느적 하고 은행나무가 우뚝 선 뜰엔 노란 낙엽들이 예쁘게 쌓여 비를 맞고 있었다. 명륜당과 동재 서재의 처마를 따라 낙숫물 떨어지고 명륜당 마루에 올라 향교 뜰을 내려다보며 명상에 잠기니 옛 유생들이 공부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면서도 고요하다. 이 강당에서 그들은 공자왈, 맹자왈 했었겠지

 

대성전에는 문이 잠겨 들어가진 못하고 공자를 비롯한 옛 성인들에게 마음속으로 인사하고 나오는 길에 경성대 컴퓨터공학과 학생 3명을 만났다. 과제 차 답사를 와서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는 모습에서 억지로 온듯한 느낌도 살짝 비치는 그들에게 사진을 찍어주고 간략하게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전공과 전혀 관련 없는 이 곳을 찾아와서 이곳 저곳 기웃거리는 그네들의 모습에서 여러 상념이 스쳐 지난다.

 

동래향교 남루南樓 처마 아래에서

 

우산을 가지고 오지 않은 탓에 동래향교를 나서다 정문인 남루 아래에서 비를 피하며 상념에 잠겼다. 코흘리개 어린 시절부터 우리역사와 문화유산에 관심이 많았던 탓에 이곳 저곳 타지로 나갈 때면 늘 그 지역의 문화유적을 둘러보곤 했었다. 심산유곡의 옛 사찰, 텅 빈 절터, 서울의 으리으리한 궁궐, 옛 영화를 뒤로하고 황량함이 감도는 경주 신라의 숨결, 험준한 산악에 자리한 높은 철옹성들, 완만한 고개마루에서 지나는 사람의 소원을 묵묵히 듣고 있는 색색깔 화려한 서낭당, 우리네 정서를 그대로 흠뻑 머금은 고택 정원에 지저귀는 작은 새들, 가파른 절벽에 미소 짖고 있는 마애불의 푸근한 품, 초라한 살림집 담벼락에 깔린 옛 건물의 큼직한 초석들, 이름 모를 기와조각들까지 그 들 앞에 마주서서, 그 들의 곁에서 숨쉬어 보고 어루만지는 그 느낌이 정말로 좋았다.

 

 지금 한반도의 동남쪽 끝 부산. 조선시대 이전엔 일본과 접하고 있어 중요한 변경지역의 하나였던, 지금은 대한민국의 제2의 도시라는 위상을 떨치고 있는 부산의 중심 유적에 서있다. 유난히도 근 현대 우리민족 수난사와 더불어 많이 파괴되어버린 부산지역 문화재를 접할 때 마다 안타까움과 슬픔이 교차한다.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살아 오면서 부산 곳곳을 손바닥처럼 다니며 수도 없이 지나쳤던 어린 시절 일상의 기억들 속에 부산의 문화유적은 거의 없었다.  동래읍성, 금정산성, 범어사, 고분군들, 철새도래지, 만덕사지, 부산진성지, 몰운대, 태종대, 신선대, 장안사, 향교들, 그리고 왜성들 등등... 수많은 유적들은 많은 것들이 외진 곳에 무관심으로 방치되어 있었다.

 

다른 지방에 가면 발에 물집 생기도록 문화유적 탐방을 하던 나는 정작 우리고장의 문화유적을 살펴 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탐방을 시작했다. 고등학생 때부터 한 두 곳씩 시작한 나의 향토사 탐방중 많은 유적들에서 제대로 된 안내가 없는 탓에 보물찾기 같은 대 모험을 펼치기도 했다. 솔직히, 아직도 부산의 문화재중 많은 것들이 시민들과 정부의 무관심 속에서 방치되고 있고, 안내표지판도 제대로 되지 않은 것들이 있다. 오늘 둘러본 동래읍성도 몇 년 전 보다는 나아졌지만 여전히 처음 찾는 이들에게 보물찾기하는 기분을 선사하고 있음을 느낀다.

 

동래읍성은 몇 년 전부터 발굴이 활발해지고 복원도 점차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 방문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복원에 허점이 너무 많이 보인다. 늘 생각하는 문제지만, 오늘도 역시 더 신중한 복원이 이뤄졌으면 하면서 답사를 마무리 한다.

 

 

11월 27일 월요일 동래읍성 탐방기

출처 : 구름나그네의 자그마한 쉼터
글쓴이 : 구름나그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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