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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45년만의 재회1 - 경복궁 집옥재,협길당,팔우정

by joolychoi 2006. 11. 6.

지난주 일요일은 개인적으로 참 즐거운 날이었습니다.

경남 사천에서 블러그를 통해 알게 되어 오빠, 동생 하기로 약속한 동생이 서울에 볼 일이 있어 올라온 김에 하루 동안 서울 구경을 시켜주기로 약속을 하였는데 경복궁과 국립고궁박물관을 구경 시켜주기로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저야 올 해만 경복궁을 다섯 번도 넘게 와보았지만 멀리서 오랜만에 서울나들이를 온 사람이 서울에 아주 멋진 곳을 나두고 다른 곳도 아닌 궁궐과 박물관 관람 제안을 흔쾌히 응해주었다는 것만으로도 저를 기쁘게 했습니다.

 

 

 

왕과 왕비만을 위한 휴식공간이었던 향원지와 향원정.

공식적인 국가연회장소였던 경희루보다 규모는 작지만 더 아름답고 운치가 있다.

 

먼저 고궁박물관을 둘러보고 경복궁 곳곳을 다리 아프다는 동생의 하소연을 못 들은 채 하면서 알고 있는 상식으로 설명을 해가며 곳곳을 돌아보다가 드디어 언제나 경복궁 관람의 마지막 코스였던 향원정과 열상진원 그리고 복원공사중인 명성황후 시해장소인 건청궁의 설명을 마치고 돌아가려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때 저 멀리 그 동안 보지 못했던 건물이 보였고 그 앞에서 사진을 찍는 관람객들을 발견하였습니다. 

 

저는 그제서야 그곳이 얼마 전 기사로만 개방 소식을 들었던 집옥재, 협길당, 팔우정 이었고 그 너머에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이 있다는 것이 생각났습니다.

 

 

 

 왼쪽부터 팔우정, 집옥재, 협길당. 세 건물은 복도로 서로 이어져 있다.

 

세 건물 중 가운데 중심건물인 집옥재는 겹처마 맞배지붕의 양식인데 답도가 있는 월대가 있는데 경복궁중 유일하게 중국풍으로 건축된 건물입니다.

 

 

 

현판의 글씨는 송나라 명필 미불의 글자를 집자 하여 만들었고 중국풍에 따라 세로로 쓰여졌다.

 용마루 끝에 용모양의 이물도 중국양식이다.

 

 

보통 궁궐의 건물 중 임금과 관련된 건물은 전(근정전, 사정전)이나 궁(건청궁)을 붙이는데 집옥재는 특이하게 재()를 붙였는데 ()숙식 등 평상 주거용으로 쓰거나, 주요 인물이 조용하게 지낼 수 있는 용도로 지은 건물을 말합니다. 창덕궁의 낙선재(樂善齋)도 그에 속하는데 편안히 쉬면서 이런저런 일상을 지내는 사적 공간의 의미가 많은 건물입니다.

 

 

 

 월대중앙에 벽사의 의미를 지닌 서수를 두어 다른 건물과의 격이 다름을 알 수 있다.

 

황제가 기거하는 곳에서도 벽사의 의미인 서수를 조각하더라도 이렇게 위압적이지 않고 무섭지 않게 표현한 것. 바로 우리 민족문화의 너그러움과 해학성 아니면 달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측면과 후면을 황색 벽돌로 둘러 쌓여 있는 것도 전형적인 중국양식이다.

 

 

 

집옥재 내부는 중앙에 넓은 대청이 있으며 대청의 뒤쪽과 좌우에는 대청보다 한 단 높게 하고 구들을 들였다. 뒤편에서 2층으로 올라가게 되어 있는데, 2층은 장 마루를 깐 다락과 같은 구조이다.

 

집옥재는 건청궁을 지을 당시인 고종 10(1873)년 무렵 건청궁과 함께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고종이 서재 겸 별채로 사용하던 곳입니다. 고종 13(1876) 경복궁이 대 화재를 만나 왕이 창덕궁으로 잠시 옮겼다가 고종 22(1885) 경복궁으로 환궁해 25(1888) 내전을 복구할 때까지 왕이 서재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둥근 달 모양의 만월창. 양 옆으로는 반월창이 있다.

창살 형식도 전형적인 중국식이다. 창 뒤로 보이는 담장 너머가 청와대 앞길.

 

 

집옥재의 중국풍이 의아하게 생각하실 분도 계실 텐데 그 당시 이런 중국풍은 최첨단 신식양식이었습니다. 현재 우리세대가 서양식 아파트를 선호하는 것과 같은 의미라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또 제 추측입니다만 대원군 이하응이 개인적으로 선호했던 취향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왜냐하면 대원군 별장이었던 석파랑도 이와 같이 중국풍으로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별장인 석파정의 부속 사랑채.

 

외벽을 벽돌로 둘러쌓았고 만월창이 보입니다 부암동에 석파정에 있던 건물인데 현재는 세검정에 옮겨 와 복원(서울시 유형문화재 23)시킨 건물로 석파랑이란 고급 한식점 안에 있습니다.

 

 

서재로 사용했던 건물인 만큼 서고가 있는 건 당연. 조선시대 북박이 책장이라 부를 수 있겠다.

 

 

 

<협길당> 협길당은 집옥재의 동쪽에 있는 부속건

 

협길당은 전형적인 조선양식으로 지어진 건물로 팔작지붕 양식에 전면 5간 규모이나 '' 자로 꺾여 있습니다. 팔작지붕 특유의 단아하면서 기품이 느껴지는 건물입니다.

 

 

 

집옥재 서쪽으로는 고종의 책을 보관했던 팔우정이 있습니다. 집옥재가 서재라면 팔우정을 개인 도서관으로 볼 수 있습니다. 건물형태는 이층 팔각 정자형태로 집옥재와 마찬가지로 청나라 풍이지만 단촐 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느껴지는 건물입니다.

 

집옥재, 협길당, 팔우정은 이처럼 제각기 독특한 양식과 분위기를 뽑내며 서로 어깨를 맞댄 채 있습니다. 여러 가지 양식이 어울려져 있는 모습이 당시 어지러웠던 고종의 처지와 닮아 있는 것 같아 조금 씁쓸해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양식의 건물이 함께 있으면서도 전혀 어색하지 않는 것은 건물 하나하나가 자기 개성만 강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조화스럽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며 이런 조화스러움은 황제의 거처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위압적이지도, 보는 이로 하여금 위축시키지도 않는 자유분방함과 더불어 우리 민족의 너그러운 문화적 성정의 결과인 것 같습니다.

 

5.16 쿠데타 이후 45년 동안이나 개방되지 못했던 집옥재 권역이 노무현 대통령의 청와대개방에 따라 개방되면서 언제나처럼 향원정에서 쓸쓸히 발걸음을 돌리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더욱 기쁜 소식은 집옥재 바로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신무문의 개방인데 신무문의 개방의 의미는 단순한 궐문 하나의 개방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야기가 길어지므로 신무문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 올리겠습니다.

 

 

 

2006 . 11 . 5

 

 

 

금강안金剛眼

 

 

출처 : 우회전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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