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추菊秋의 세시, 중구重九
국화향과 단풍을 즐기며 풍류를 읊다
음력 9월은 열심히 땀 흘려 지은 농사를 거둬들이며 다가올 겨울에 대비하는 때이다. 24절기 가운데 찬이슬이 내린다는 한로와 첫서리가 내린다는 상강이 모두 이달에 들어있다. 일 년 중 하늘이 가장 높고 푸를 뿐만 아니라 국화 향기가 온 대지에 그윽한 계절이다. 또한, 9월에는 지금은 우리 기억 속에서 사라져 버린 유서 깊은 옛 명절 중구가 있다. 가을 향기 깊어지는 10월, 국화향과 단풍을 즐기던 중구의 세시 풍속에 대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중구(음력 9월 9일)는 9월 중 유일한 속절俗節로서 중양重陽 또는 중광重光이라고도 하며, 올해는 양력 10월 30일이다. 음양사상陰陽思想에 따르면 숫자에서 홀수는 양수陽數, 짝수는 음수陰數라 하여 ‘양의 수’인 홀수를 길수吉數로 여겼는데, 중양·중광은 홀수인 양이 겹쳤다는 의미이다. 예로부터 설(음력 1월 1일), 삼짇날(음력 3월 3일), 단오(음력 5월 5일), 칠석(음력 7월 7일)은 양수가 중첩된다 하여 중히 여겼고, 특히 9월 9일 중구는 중양이라 하여 중시하였다. 중구라는 말은 양수인 구九가 겹친 날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중구는 중국 한나라 때부터 널리 행해졌다고 전한다. 숫자 ‘9’는 하늘과 임금을 상징하는 수로, 옛날 중국에서는 하늘의 제일 높은 곳을 구중천이라 일컬었으며, 땅이 아홉 개의 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였다. 9는 황제만이 쓸 수 있는 숫자여서 일반 백성은 함부로 사용할 수 없었다. 중구는 임금을 상징하는 9자가 겹치는 날로서 양기가 센 날로 예로부터 경사스러운 날로 여겼다.
차례의 명절, 중구
고려시대에 중구는 원단(설), 상원(대보름), 상사(삼짇날), 한식, 단오, 추석, 팔관, 동지와 함께 9대 속절로서 큰 명절이었고, 차례의 명절이기도 하여 지역에 따라서는 중구에 차례를 지냈다.
행인杏仁 이승만李承萬(1903~1975)이 쓴 『풍류세시기風流歲時記』에는 “경북지방의 서북부지역에서는 1년 수확기가 추석 때보다는 아무래도 늦어지게 마련이어서 조령에 올리는 천신의 행제를 중양절에 가서야 올리게 되므로 이 날이 곧 농공 추수감사제에 맞먹게 되어 명절답게 즐긴다고들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실 안동을 비롯한 경북 북부지역에서 추석날 차례를 지내기 시작한 것은 산업사회 전후로, 추석이 국가적인 공휴일이 되면서부터였다. 경북 북부지역은 추석 무렵에 햅쌀이 나지 않으므로 중구를 앞두고 벼를 거두어 햅쌀로 만든 송편을 빚어 차례를 지낸 것이다. 요즘도 경북 안동시 하회마을에서는 중구 차례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이 밖에도 추석 때 햇곡식으로 차례를 드리지 못한 집에서는 중구에 차례를 다시 지냈고, 일부 산간 지방에서는 마을 제사를 올리기도 하였다. 또한, 기일忌日을 모르는 조상의 제사나 연고자 없이 떠돌다 죽었거나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의 제사는 중구에 지내기도 한다.
국화와 단풍을 만끽하는 중양절의 운치
‘구시월 세단풍’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음력 9월은 단풍의 계절이다. 예로부터 중양절에는 높은 산에 올라 단풍을 즐기고 시를 지으며 하루를 노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를 등고登高라고 한다. 고승의 『사물기원』을 보면 전국시대 제나라의 경공이 처음으로 등고를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우리나라에서도 사대부들은 중양절에 높은 곳에 올라가서 시를 지었다. 고려시대 문헌에는 등고와 관련하여 “작년 중구일 곡봉 동쪽에, 공 따라 술 들고 등고하였네. 지금은 용수산 아래 병 걸려 누워있으니, 그 누가 이 늙은이를 불러주지 않는구나.” 등의 기록이 나온다. 또한, 조선 후기에 간행된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중구에 서울의 남산, 북악산에서 마시고 먹으며 즐긴다. 이는 등고의 옛 풍속을 답습한 것이다. 남한산, 북한산, 도봉산, 수락산, 청풍계, 후조당은 단풍 구경하기에 좋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중구 무렵의 야외놀이가 중국의 등고 풍속을 따르는 것이라 기록되어 있지만 실상 이맘때면 산과 들에 소풍가기 좋은 때이니 반드시 중국 풍속이 전래한 것이라고만 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음력 9월은 국추菊秋라 할 만큼 국화가 만발한 계절이다. 중국 한나라 사람들은 중구절에 국화주를 마시면 장수할 수 있다고 여겨서 즐겨 마셨고, 송나라 때에는 국화를 감상하는 풍속이 성행했다고 한다. 국화주를 마시고 국화 꽃구경을 하는 송나라 때의 풍속은 고려 중기 이후에 개경에서도 유행을 한 듯하다. 이규보는 “젊었을 때는 중양절 만나면, 부지런히 황국을 찾았었네. 좋은 술 나쁜 술 따지지 않고, 이것 띄우니 향내 풍기더라. 지금은 녹봉 좀 넉넉하여, 독 안에 좋은 술 담겨 있네. 내 늙고 게을러서, 정취情趣 없어 삭막하도다. 국화야 피거나 말거나, 시절 빠른 것만 슬퍼하누나. 손이 오매 굳이 잔 씻어, 한 잔 술에도 즐거움 족하구나. 울타리 옆 꽃으로 하여금, 부끄러움 면하게 했네.”라는 시를 지어 국화주 마시기와 국화 꽃구경 풍습을 적어 두었다.
중양절에 국화를 감상하거나 국화잎을 따다가 술을 담고 화전을 부쳐 먹는 풍습은 비단 고려시대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으니, 조선 후기의 문인 유만공柳晩恭이 지은 『세시풍요歲時風謠』를 보면 중구에 관한 시詩가 있는데, “금꽃을 처음 거두어다가 둥근 떡을 구워 놓고 상락주桑落酒를 새로 걸러 자그마치 술지게미를 짜냈다. 붉은 잎 가을 동산에 아담한 모임을 이루었으니, 이 풍류가 억지로 등고登高 놀이하는 것보다는 낫다.”라고 하였다.
국화주는 그 향기가 매우 좋아 많은 사람이 즐겼는데, 가난한 사람들은 막걸리에 노란 국화를 띄워 마시기도 했다. 이와 함께 술과 음식을 장만해서 산이나 계곡으로 단풍놀이를 가기도 했는데, 바로 오늘날 가을 소풍의 기원이라 할 수 있겠다. 이와 같이 중구에는 한 해 농사를 다 지어 놓고 풍년 결실의 기쁨을 나누면서 단풍과 국화 등 저물어가는 가을철의 자연미를 감상하였다.
노인을 위해 연회를 베풀다
조선시대 왕실에서는 왕이 중양절에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는데 이를 기로연耆老宴이라고 한다. 조선 초 태조가 환갑이 되던 해인 1394년(태조 3년)에 태조는 자신을 포함하여 나이가 많은 고관을 예우하기 위하여 기로소耆老所를 설치하고, 기로소 내의 원로 문신들에게 봄에는 상사上巳(음력 3월 3일), 가을에는 중양重陽에 기로연을 베풀었다. 성종 이후에는 ‘기로연’이라는 말 대신 ‘기영연耆英宴’이라는 말이 사용되었고, 『정조실록正祖實錄』 중 ‘성종조 이후부터 매년 중구일重九日을 기로연의 잔칫날로 삼았다.’라는 내용으로 보아, 이후 기로연이 중양절에만 행해졌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본래 기영회 또는 기로연에 대한 기록은 고려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고려시대에는 왕이 노인들에게 선물을 주며 베푸는 연회의식인
노인사설의老人賜設義가 행해졌다고 한다.
중양절에 행해졌던 기로연의 모습은 당시 모습을 기록한 그림을 통해서 엿볼 수 있는데, 선조 18년의 기록화인 「선조조기영회도宣祖朝耆英會圖」는 1585년 가을 중양절의 기영회의 모습을 담고 있다. 오른쪽 상단 구석에 나무 한 그루만 남긴 채 산수 배경을 철저하게 배제시키고 계회契會 장면만 중점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실내에는 7명의 노인이 음식상을 받아 놓고 가무를 감상하고 있다. 음식상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음식이 왕으로부터 하사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근경의 난간 안쪽 좌우에는 아름다운 여인들이 여섯 명씩 앉아 있고 그 중앙에는 주칠탁자 위에 큼직한 꽃병이 좌우로 나란히 놓여있다. 또한, 방안에는 촛불이 밝혀져 있어 저녁임을 말해준다. 그리고 실외에는 악공들과 무릎 꿇은 관리들의 모습이 보이고 있다.
기로연을 왕실에서만 개최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화가인 단원 김홍도가 그린 「기로세련계도」는 단원이 59세가 되던 1804년, 개성에서 열린 기로연을 그린 것이다. 그림의 상단에는 1808년 경기도 암행어사를 지낸 홍의영(1750~1815)이 짓고 쓴 머리글이 있어 이 그림이 그려진 사연을 알려준다. 즉 1804년 늦가을에 지금의 개성 송악산 만월대 아래에서 기로연이 열렸으며, 마침 김홍도가 그것을 보았기에 부탁하여 그렸다는 것이다. 그림의 하단에는 기로회에 참석한 64인의 이름을 적어놓았다.
이 그림은 단원이 잘 구사했던 공백 이용과 대각선 기법이 그대로 드러난 빼어난 작품으로, 송악산의 여러 봉우리에는 지는 단풍이 희미하게 표현되고 봉우리가 줄지어 이어졌는데, 그중 왼쪽 봉우리를 안개에 가려두어 공간의 미를 살렸다. 더욱이 그 여백 아래에 소나무 숲을 구성하여 원근의 묘미를 느끼게 한다. 송악 아래 펼쳐진 차일 밑으로 비스듬히 4각의 연회장을 그리면서 전후좌우의 주변에 130~140인의 인물을 배치하여 연회광경을 그림의 핵심에 두었다.
이 그림에 묘사된 기로연은 지방에서 행해졌던 것으로 왕실의 기로연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북, 장구, 피리, 대금, 해금의 삼현육각 여섯 악기가 한데 어울려 한바탕 흥겨운 가락을 몰아가고, 가운데 마당에는 무동 둘이 춤을 추고 있다. 그런데 이것을 구경하려 몰려든 사람들이 만만치 않으니, 가을 들놀이의 절정인 중양절이 예전에는 얼마나 짜임새 있고 큰 축제였는지를 가늠할 수 있게 한다.
자료제공 _ 국립민속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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