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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 내 (Gaenea)
가족과 가정에 대하여

文成公 諱 阿 系 ( 문성공 휘 아 계 )

by joolychoi 2018. 8. 17.


 


 

文成公 諱 阿 系 ( 문성공 휘 아 계 )


 

 

가. 淵 源(연원)

 

高麗(고려) 忠肅王朝(충숙왕조)에

文科 及第(문과 급제)하고 門下侍中(문하시중), 平章事(평장사)에 올라

善政(선정)을 베푼 崔 阿(최 아)가 全州崔氏(전주최씨) 한 系統(계통)의

一世祖(1세조)가 되시는데 高麗末(고려말)에 明(명)나라에

使臣(사신)으로 들어가 복잡하고 어려운 國內(국내)문제를

탁월한 外交的(외교적) 수완으로 타결하여 큰 功(공)을 세우고 돌아오므로

忠肅王은 公(공)을 完山君(완산군)에 封(봉)하시고, 文成(문성)이란

諡號(시호)를 내리므로 後孫(후손)들은 그를 一世祖로 하여

本貫(본관)을 全州로 하여 世系(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나. 一世 祖(1세조)

 

全州崔氏 文成公系(전주최씨 문성공계) 一世 祖는 崔 阿라는 분이시다.

崔 阿는 字(자)가 衡之(형지)로 고려 27대왕 忠肅王 때 분이시다.

어려서 文科 科試(과시)에 合格(합격)하고 廉正 潔白(염정 결백)한 公의

생활신조는 곧 바로 나라 정치에 반영이 되어, 정부로부터 信望(신망)을

받고 백성들로부터 가는 곳 마다 尊敬(존경)을 받으시고

벼슬은 날로 오르시어 門下侍中(지금의 국무총리) 平章事까지 올랐다.

 

公께서 贊成事(찬성사 : 차관급) 때 국가고시를 정학하였는데

李 嵒(이 암) 등 37명의 精銳(정예)선비를 뽑아 국가에서 역사에

드문 인물을 얻었다는 평을 받았다.

 

公께서 천명을 다하시어 작고 하시자

나라에서는 文成(크게 문학을 일으켜 완성하셨다는 뜻)이란

諡號를 내리시고 完山君에 봉하였다.

 

公은 四男二女(4남2녀)를 두셨으니

長男(장남)은 慶尙按廉使(경상도안렴사: 경상도도지사)를 지낸 龍生(용생)

次男(차남)은 大護軍(대호군: 대원수급)을 지내신 龍角(용각)

三男(3 남)은 尙書吏部(상서이부)의 判事(판사: 장관)를 지낸 龍甲(용갑)

四男(4 남)은 中郞將(중랑장: 령관장교)을 지낸 龍鳳(용봉)

또 長女(장녀)는 全州柳氏(전주유씨) 柳池(유지)에게 출가했고

次女는 忠保節功臣 三重大匡 門下贊成 崔善能

(충보절공신 삼중대광 문하찬성 최선능)에게 출가했다.

 

公의 墓所(묘소)는 全羅北道 完州郡 所陽面 竹節里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죽절리)에 있는 周德山 粉土洞(주덕산 분토동)에

모시고, 齋室 周德齋(재실 주덕재)에서 守護 管理(수호 관리)하며

이 곳 周德山 粉土洞의 齋閣(재각) 周德齋 隣近(인근)에는

公의 三子 判事公 崔龍甲(판사공 최용갑), 그리고 四子 中郞將公

崔龍鳳(중랑장공 최용봉)孫 司醞同正公 崔乙仁(사온동정공 최을인)의

壇閣(단각)이 있으며 또, 그의 曾孫(증손)인 月堂公 崔 霮

(월당공 최 담) 玄孫(현손) 少尹公 崔得之(소윤공 최득지)

烟村公 崔德之(연촌공 최덕지) 등의 墓所가 있다.

모든 享祀(향사)를 다스리는 周德齋는 竹節里 마을을 지키는

唯一(유일)한 齋閣이다.

 

다. 宗 家(종 가)

 

高麗 忠定王(충정왕) 2년에

당시 내시의 무리들이 元(원) 나라의 총애를 받고 있음을 기회로

우리나라 백성들에게 방자하게 굴고 민폐를 끼치고 있는 것을

慶尙道 按兼使인 崔龍生이 그들의 罪(죄)를 낱낱이 들추어

여러 곳에 방을 붙이게 하여 백성들에게 폭로하였다.

이일을 御香使(어향사 : 제사지내는 사신)로 내려온 朱元之(주원지)가

公主(공주)에게 고해 바쳐 해임케 했다.

 

崔龍生은 慶尙道 按廉使로 왔다가 눌러 살면서

泗川郡(사천군)과 固城郡(고성군) 일대 子孫(자손)이 繁盛(번성)하면서

宗家가 이루어져 현재 固城郡 九萬面(구만면) 孝洛里(효락리)에

200여호가 살고 있다.

 

라. 人 脈(인 맥)

 

長子 按廉使公 崔龍生은 元나라의 악폐를 반박하여, 剛直(강직)한 관리로

이름을 떨쳤으며 寶文閣 大提學(보문각 대제학)을 지낸 次子 崔龍角 등

頭官(두관), 名士(명사)가 많이 배출되었다.

 

壬亂倭亂(임진왜란) 때 僧兵將(승병장)으로 奮然(분연)히 일어나

나라의 危急(위급)을 구해낸 西山大師 崔汝信(서산대사 최여신)과

역시 壬亂倭亂의 殉節士 茅山公 崔琦弼(순절사 모산공 최기필)

壬亂倭亂의 義兵將 崔均堈(의병장 최균강)

兄弟(형제)인 義敏公 義肅公(의민공 의숙공)의 功積(공적)은

慶南 晋州 南江面(경남 진주 남강면)에 세워진 戰績碑(전적비)가

말해주고 있다.또 女眞族(여진족)의 內侵(내침)을 大破(대파)한

德村公 崔希汀(덕촌공 최희정) 등을 들 수가 있다.

 

中興(중흥)의 派祖(파조)인 中郞將 崔龍鳳의 孫이 되는 烟村公 崔德之는

父 月唐 崔 霮과 같이 四父子(4부자) 모두 提學(제학)을 했으므로

五提學이라 일컫는다.이 외에 儉齋公 崔水智(검제공 최수지),

認齊公 崔 睍(인제공 최 현) 등 綺羅星(기라성) 같은 人物(인물)들이 많다.

 

마. 時 享(시 향) :따로 정리 하여 둠.

 

바. 行 列(항 렬)

따로 정리 하여 둠.

 

사. 族譜刊行(족보간행)

文成公 諱 阿 系의 族譜는 癸亥(계해/1683년),

肅宗 9년에 一卷(1권)으로 된 第一修譜(제1수보)인

初成譜(초성보)가 刊行되었다. 그리고 癸亥(1743년) 英祖(영조)19에

初成譜가 刊行된지 60년만에 四卷(4권)으로 된

第二修譜(제2수보)가 刊行되었다.

第三修譜(제3수보)는 癸亥(1803년) 純祖(순조)3에

第二修譜가 刊行된지 역시 60년 만에 刊行되었는데

지금까지 發行(발행)된 규모보다 큰 十一卷譜(11권보)로 되었다.

第四修譜(제4수보)는 癸亥(1863년) 哲宗(철종)14에 十卷(10권)으로된

第四修譜가 刊行되었다. 第五修譜(제5수보)는 丙申(병신/1896년)

建陽(건양)1에 發行되었는데 2二十四卷譜(24권보)로 刊行되었고

第四修譜가 發刊(발간)된 지 33년만이다.

이후로 各派(각파)에서 몇 차례의 派譜(파보)만 했을 뿐

大同譜(대동보)로는 이루어 지지 않고 長派(장파)인 按廉使公派譜

(안렴사공파보)로 丙子(병자/1936년)과 1955,1977년

세 차례에 걸쳐 編修(편수)한 것과

各派에서도 한 두 차례씩 發刊하였다

 

아. 派名(파명) 및 世居地(세거지)

 

文成公系는 크게 四派로 나뉘어 진다.

按廉使公派, 大護軍公派, 判事公派, 中郞將公派 等(등)이다.

 

1. 按廉使公派

 

慶尙南道 泗川郡 正東面 豊井洞(경상남도 사천군 정동면 풍정동)과

慶尙南道 固城郡(고성군) 隣近地域(인근지역)에 많이 世居하고 있다.

派祖 崔龍生은 慶尙道 按廉使를 歷任(역임)한 後

지금의 慶尙南道 泗川郡 正東面 豊井洞 隣近에 살기 시작하면서

泗川郡 正東面 豊井洞과 固城郡 隣近이 按廉使公의 世居地가 되었다.

이 밖에 馬山(마산) 晋州(진주)에도 많이 살고 있다.

主要 世居地域(주요 세거지역)은 慶尙南道 固城郡 九萬面

(구만면)에 200여호를 비롯下一面(하일면) 130여호,

下二面(하이면) 40여호,介川面(개천면) 80여호, 東海面(동해면) 300여호

山淸郡 丹城面(산청군 단성면) 50여호河東郡 玉宗面(하동군 옥종면)

30여호, 北川面(북천면)에 60여호가 있고

이 밖에 統營市 光道面(통영시 광도면) 80여호,

慶尙北道 龜尾市 海平洞(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동) 50여호,

玉城面(옥성면)에 \60여호 長川面(장천면)

일대에 30여호 등이다.

 

2. 大護軍公派

 

全羅北道 金堤(김제)를 集團世居地(집단세거지)로 꼽는다.

派祖 崔龍角은 檢校大護軍을 지냈는데

大護軍은 武官(무관)벼슬로 大元帥級(대원수급) 이라고

高麗史(고려사)에 記錄(기록)되어 있다.

公의 長男 崔 邕(최 옹)이 版圖司典書(판도사전서)를 지냈고

全北 任實郡(임실군)에 世居하므로 이 子孫들은 任實이 世居地가 되고

次子인 崔 哲(최 철)도 역시 典書를 역임하는데 여기서 나온 子孫들은

全北 金堤를 비롯 益山(익산), 全州, 完州(완주), 南原(남원) 등지에

퍼져 살고 있으며 忠南 恩津(충남 은진)과

京畿道 坡州(경기도 파주)에도 약간 살고 있다.

全北 金堤市 進鳳面(진봉면) 260여호 聖德面(성덕면) 40여호,

萬頃邑(만경읍) 30여호로 金堤市 隣近이 가장 많은 主要 集團世居地域

(집단세거지역)이며完州郡 鳳東邑(완주군 봉동읍) 신후리에 150여호,

九耳面(구이면) 두방리에 60여호로 完州郡 隣近에도 많이 살고 있다.

이 밖에 益山市 三箕面(삼기면)에 200여호, 南原市 50여호,

二白面(이백면)에 30여호 任實郡 只沙面(지사면)에 20여호 등이다.

 

3. 判事公派

 

全羅北道 茂朱(무주)가 世居地이다. 派祖 崔龍甲은

判事(판사) 三重大匡(삼중대광)의 品階(품계)에 있다가

全州로 落鄕(낙향)하고 長子 崔 濚(최 영)의 子孫들이

大邱 凡勿洞(대구 범물동)에 100여호 世居하고 있으며

次子인 崔福生(최복생)의 子孫들은 全北 茂州郡 茂豊面

(무풍면) 철목리에 100여호가 살고 있다.

 

4. 中郞將公派

 

全北 扶安(부안), 金堤, 全南靈岩(전남 영암)을 集團世居地로

꼽을 수 있다. 派祖 崔龍鳳은 武官給(무관급)으로 副大將

(부대장)의 品階로 四派 中(4파 중) 가장 많은 人才(인재)와

後孫(후손)을 둔 派系(파계)이다.

中郞將公의 長子 司溫同正公 崔乙仁(사온동정공 최을인)의

孫 提學公 崔匡之(제학공 최광지)의 子孫들은

全北 扶安, 金堤에 集團的(집단적)으로 世居하고 있으며

그 외에 全羅南道 新安(신안), 靈岩 등지에도 살고 있다.

姻村公 崔德之는 中郞將公 崔龍生의 四世孫(4세손)으로

南原府使(남원부사)를 역임한 후 全南 靈岩의 永保村(영보촌)에

내려가 많은 後學(후학)을 養成(양성)하면서 餘生(여생)을

지내었는데 永保村에는 烟村公이 學問(학문)을 硏究(연구)하고

講論(강론)했던 存養樓(존양루)가 잘 保存(보존)되어 있으며

影堂(영당)에는 그의 影幀(영정)이 모셔져 있어 代代(대대)로

世居해온 後孫들이 崇祖精神(숭조정신)을 傳承(전승)하고 있다.

 

全州 豊南洞(풍남동)에는 烟村公의 先考(선고)인 月塘公 崔霮이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六百餘年(600여년)의 오랜 세월 동안을

宗垈(종대)를 지키고 서 있으며

 

全羅北道에서는 全州 三大 老古樹 中

(전주 3대 노고수 중) 하나로 全州市 2등급으로

定(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또 幼學(유학)들이 學問을

전수했던 古家(고가)는 全州崔氏 宗垈로 보존하고 있으며

 

全州 八景(전주 8경)의 하나인, 寒碧堂(한벽당)은

悠悠自適(유유자적) 學問을 닦으며 碩學受諾(석학수락)하는

일과로 89세의 생애를 마친 月塘公이 그의 나이 七十一世

(71세) 때인 1416년에 지은 것이라고

김영한이 지은 墓碑銘(묘비명)에 새겨져있다.

 

主要世居地域으로는

全北 扶安郡 석동 일대에 40여호, 舟山面(주산면) 동정리 80호,

扶安邑 일대에 100여호 井邑郡(정읍군:지금은 정읍시) 초강면

솔안 일대에 200여호, 德川面(덕천면) 우덕리에 100여호

그리고 任實郡에 40여호가 있는데

이 곳 任實郡 只沙面 방계리에는 烟村公과

巖溪公 崔連孫(암계공 최연손)이

배향된 舟岩書院(주암서원)이 있다.

 

全羅南道 新安郡(전라남도 신안군) 장촌리 일대에 100여호가

살고있는데이 곳은 섬 지역으로 提學公 崔直之(제학공 최직지))의

後孫이 이 곳에 정착하 고 있다.

 

烟村公 後孫들의 集團世居地는 靈岩郡 永保里(영보리)에

60여호 昇州郡(승주군: 지금은 순천시에 속함) 海龍面(해룡면)

하사리 80여호 上沙面(상사면) 죽절리에 50여호가 있으며

忠淸南道 舒川郡 馬西面(충청남도 서천군 마서면)

봉남리에 60여호 등이다. 그리고 忠淸北道 沃川郡 靑城面

(충청북도 옥천군 청성면) 능월리에 20여호와

全南 長興郡 冠山邑(장흥군 관산읍) 수동에 30여 호가 있고

宗鄕(종향)인 全州는 비교적 적다.

 

자. 歷代名人(역대명인)

 

崔龍生

 

按廉使公 崔龍生은 慶尙道按廉使를 지내셨기 때문에

按廉使公이라고 한다.文成公의 첫째 아드님으로 고려 30대왕

忠正王때 분이시다. 천성이 剛直하시고 廉正하며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 하시고 효심이 두터웠다.

 

學問이 깊은 경지에 이르시자 국가고시인 文科 大科에 급제하고

司憲府 持平(사헌부 지평: 법원 서기관급)에서

慶尙道 按廉使가 되었다. 때는 바로 고려 30대왕

忠正王 二年二月 庚寅(경인)인데 당시 내시의 무리들이

元나라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믿고,

우리나라 백성들에게 방자하게 굴고 민폐를 끼치고 있는 것을

분개하시고 그들의 죄를 낱낱이 들추어 여러 곳에 방을 붙여

백성들에게 보이셨는데 이일을 御香使로 내려온 朱元之가

公主에게 고해 바쳐 공을 해임시키고

金有謙(김유겸)을 대신 발령하였다.

 

公은 二男一女(2남1녀)의 三男妹(3남매)를 두셨는데,

長子 君甫(군보)는 자손이 없어 끊겼고 次子 田雨(전우)는

文科에 及第 後 版圖司正郞(판도사정랑 : 재무부국장)을 했고,

따님은 開國功臣(개국공신) 寶城君(보성군)을 지낸 吳蒙乙

(오몽을)에게 출가했다.

 

公께서 慶尙道 按廉使에서 물러나시어

慶尙南道 泗川郡 正東面 豊井洞 근처에 사시었기 때문에

子孫들은 泗川郡과 固城郡 일대에 많이 살고 있다.

公의 墓所는 泗川郡 正東面 豊井洞의 朔寧崔氏 先塋 內(삭녕최씨

선영 내)에 있는데 失傳(실전)되어 豊井洞 366번지에 壇(단)을

모셔오다가 지금은 慶尙南道 固城郡 九萬面에 齋室 玉山齋

(옥산재)를 건립 享祀를 올리고 있다.

享祀日(향사일)은 陰歷 十月二日(음력 10월2일)이다.

 

崔水智(최수지)

 

按廉使公 崔龍生의 六世孫(6세손)으로

字는 潤甫(윤보)요 號는 儉齋(검재)이며 敬庵 許 稠(경암 허 조)의

門人(문인)이다.文章行義(문장행의)가 一世에 들어났으며, 일찍이

司馬試(사마시)에 합격하고 단종 癸酉(계유)에 文科 及第하여

成三問(성삼문)과 같이 立朝(입조)하여

典翰 玉堂應敎(전한 옥당응교)를 歷任하고 書將官(서장관)으로

明나라에 가서 明 皇帝(명 황제)의 寵愛(총애)를 받아

朱子書案(주자서안), 文章正宗(문장정종), 龍碩(용석) 등

진귀한 賞品(상품)을 받았으며 그 後에 乞養(걸양)으로

玄風(현풍) 比安縣監(비안현감)이 되었으며 成宗朝(성종조)에

佐理原從(좌리원종), 功臣(공신)에 參錄(참록)하였고

都承旨(도승지)와 參贊官(참찬관), 修撰官(수찬관),

直提學(직제학)을 追贈(추증) 받았다.

崔 睍(최 현)

 

左參贊公 崔 深(좌참찬공 최 심)의 子로

按廉使公 崔龍生의 **세손이다.

子가 季昇(계승)이요 號는 認齊, 諡號는 定簡(정간)으로

金誠一(김성일)의 門人으로 天文(천문), 地理(지리), 兵法(병법)에

通達(통달)하였다.1588년 司馬試에 合格하고 1592년 壬亂倭亂 때

나라를 구하는 방법을 올려 참봉이 되고 166년 增廣別試文科

(증광별시문과)에 生員(생원) 1등으로

급제하여 檢閱(검열)이 되었다.

 

光海君(광해군)때 御士(어사)의 遷都論(천도론)이

있게 되자 이를 적극 반대하여 그 計劃(계획)을 중지 시켰다..

그 후 書狀官으로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와서 正信(정신)을 거쳐

持平(지평), 司果(사과), 副修撰(부수찬), 校理(교리) 및

文學(문학)이 되었다가 다시 正信이 되었다.

이어 備邊使(비변사)와 從士官(종사관)을 역임한 後

 

仁祖 二年(인조 2년) 李施愛(이시애) 난 때 督戰御使(독전어사)가

되었다. 다시 承旨를 역임하고 兵曹參知 大司成(병조참지 대사성),

承政院 副承旨(승정원 부승지)가 되었으며

外戰(외전)으로는 江原道 觀察使(강원도 관찰사)를 지내었다.

後에 禮祖判書(예조판서)를 特贈(특증) 받았고,

선산 松山書院(송산서원)에 祭享(제향)되었다.

著書(저서) 訥齋集(눌재집)이 있다.

 

崔山煇(최산휘)

 

認齊公 崔 睍의 長子로

字가 伯玉(백옥), 號는 洛南(낙남), 諡號는 孝憲(효헌)이다.

仁祖 六(인조 6 /1628) 柳孝立(유효립)의 역적모의를 고발하여

寧社功臣 三等(영사공신 3등)이 되고 平宗君(평종군)에 봉해졌다.

司僕侍主簿(사복시주부)를 지내고 通政大夫(통정대부)가 되었다.

나라에서 田畓(전답)과 종을 내렸으나 받지 않았다.

靑松府使(청송부사)로 재임중 53세를 일기로 卒하니

戶曹判書(호조판서)에 追贈되었다.

 

崔琦弼(최기필)

 

判書公 崔得經(판서공 최득경)의 孫子로 公은 字가 圭仲(규중)이요

號는 茅山(모산)이다. 行宜(행의)로 천거되어 奉事(봉사)와 晋州副官

(진주부관)을 지낸 後 晋州 白雲洞(백운동)에 은거하였다.

1593년 壬亂倭亂 때 晋州가 倭軍(왜군)에게 포위되어 위급하게 되자

60여명의 壯丁(장정)을 모아 城에 들어가 軍糧補給(군량보급)을

돕다가 晋州城이 함락되자 南江(남강)에 투신자살 하였다.

後에 나라에서 兵參義(병참의)를 追贈했고

晋州에 祠堂(사당)을 지어 彰烈詞(창열사)라 하고

그 곳에 祭享되었다.

 

崔光壁(최광벽)

 

按廉使公의 16세손인 崔壽仁(최수인)의 子

參判公(참판공)은 字가 公獻(공헌)이요 號는 二友亭(이우정)이다.

영조 20년 생원이 되고 1757년 丙科(병과)로 급제하여 注書(주서),

說書(설서)를 지낸 뒤

1762년 壯獻世子(장헌세자)가 참혹하게 죽음을 당하자 사임하였다.

1766년 다시 기용되어 持平(지평), 掌令(장령), 敦寧都正

(돈녕도정)을 거쳐 兵曹判書(병조판서)를 역임 하였으며

그 후 副承旨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故鄕(고향)에서 學文에 정진하였다.

 

崔潤身(최윤신)

 

文成公 阿의 후손으로 武科及第(무과급제)하여 都摠經歷(도총경역)으로

있다가 金海府使(김해부사)가 되어 涵虛亭(함허정)을 지었으니

西川 魚相公 世謙(서천 어상공 세겸)이 亭名(정명)하고

濯纓 金馹孫(탁영 김일손)이 記文(기문)을 지었으며

佔畢齋 金先生(점필재 김선생)과 교류하면서 先生이 嶺南樓(영남루)에서

證詩(증시)하였다. 水軍僉節制使(수군첨절제사)를 지내고

兵曹參判(병조참판)을 追贈받았다.

 

崔振虎(최진호)

 

字는 炳叔(병숙)이요 興虎(흥호)의 아우로

壬亂倭亂에 李舜臣(이순신)이 態川戰陳(태천전진)에서

協同控制(협동공제)하고趙宗道(조종도) 郭再祐(곽재우)와

같이 鼎律(정율)의 賊을 大破하여錄勳(록훈)되었고

今泉道察訪(금천도찰방)에 除授(제수)되었다

 

崔廷虎(최정호)

 

字는 成叔(성숙) 이고 號는慕齋(모재)이며

일찍이 沈休翁(심휴옹) 光世門(광세문)에 배워서 性理學(성리학)을

專工(전공)하여 人物(인물) 性同異說(성동이설)을 주장하였다.

父 崔 塤(최 훈)이 壬亂倭亂 당시 倭敵(왜적)과 싸우다가 죽자

平生(평생) 에 倭놈을 말하지 않았으며 동 쪽을 향하여 앉지않았다.

不幸(불행)이 早死(조사) 하였으니 沈休翁이 祭文(제문) 을짓고.

유집1권이있다.

 

崔秀岡(최수강)

 

字는 卓爾(탁이)요 號는 海亭(해정)이라

光海朝(광해조)에 官職(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숨었다.

趙潤 松任道(조윤 송임도)가 贈詩하였으니

匹馬來尋海上翁 靑山當戶水連空(필마래심해상옹 청산당호수연공)

崔仙去後崔仙在 明月淸風把握中(최선거후최선재 명월청풍파악중)

이라 하였다. 벼슬은 司圃署別堤(사포서별제)를 지냈고

壽職(수직)으로 嘉善大夫(가선대부)가 되었다.

 

崔起全(최기전)

 

字는 仲初(중초) 號는 齊月當(제월당)으로

天性(천성)이 온화하여 七歲(7세)에 文理(문리)를 通하고

자라서 明賢碩學(명현석학)들과 교류했으며

文章(문장)과 學行(학행)이 世人(세인)의 부러움을 받았다.

著書(저서)로 五行篇(오행편)과 梧桐箴(오동잠)이 있다

 

崔祥岳(최상악)

 

字는 雲見(운견)이고, 武科 及第하여 康翰顯監(강한현감)을 지냈으며

性格(성격)이 온후하고 剛直하여 官職에 進就(진취)할 뜻이 없어

고향에 돌아와 권력자와는 서로 교류하지 않았다.

崔祥順 (최상순)

 

字는 保汝(보여)요 號는 絧齋(동재)이고

柳定齋 致明(유정재 치명)의 門人이다.

經禮(경례)에 밝아서 儒學(유학)을 振興(진흥)하고

陰陽(음양) 律呂算數(율여산수)에 能通(능통)하였다.

道山書院(도산서원) 興學齋(흥학재)에서 儒生을 모아 相揖禮(상읍례)와

鄕飮酒禮(향음주례)를 베풀어 많은 학자를 輩出(배출)하였다.

著書로 太極說(태극설) 喪禮要解(상례요해) 讀書錄(독서록)

絧齋文集(동재문집)이 있다.

 

崔 潭(최 담)

 

僉節制使 崔潤身의 아들로

文學과 行義(행의)가 있음으로 德隆參奉(덕융참봉)에 제수되었으며

漢城右尹(한성우윤)을 追贈받았다.

 

崔命佑(최명우)

 

參軍(참군) 崔水勇(최수용)의 孫子로 中宗朝(중종조)에

靖國原二等(정국원2등)에 參錄되었다.

 

崔 均(최 균)

 

文成公의 十一代孫(11대손)이니 字는 汝平(여평)이요

號는 蘇湖(소호)로 일찍부터 학문에 專念(전념)하여

周易(주역)에 밝았다. 壬亂倭亂 때 아우 崔 堈(최 강)과 더불어

백의종군하여 大功을 세웠다.同知中樞府事(동지중추부사)가 되고

光海 昏朝(광해 혼조) 때 詩를 지어 뜻을 밝히고

故山(고산)에 돌아왔다. 후에 宣武原從功臣 義敏公

(선무원종공신 의민공)이란 諡號를 받았다.

道山書院에 亭祀하였으며, 崔 堈과 같이 世稱(세칭)

一家雙忠(일가쌍충)이라 한다.

 

崔 堈(최 강)

 

字는 汝堅(여견)이요 號는 蘇溪(소계)로 義敏公 崔 均의 아우다.

經吏(경리)에 밝고 詞章(사장)을 工夫하여 武科 及第하고

壬亂倭亂 때에는 가는 곳마다 大功을 세우고

특히 加里浦 僉使(가리포 첨사)가 되어 濟州島 海洋(제주도 해양)에서

大勝(대승)하자 宣祖(선조)께서 順天府使(순천부사)에 승진시키고

宣武原從一等功臣(선무원종1등공신)으로 錄勳하였다.

副摠管(부총관) 水軍節度使(수군절도사) 捕盜大將(포도대장)을 歷任하고

兵曹判書를 追贈받고 義肅公(의숙공)이란 諡號를 받았으며,

道山書院에 享祀하였다.

 

崔興虎(최흥호)

 

字는 文仲(문중), 義敏公 崔 均의 長子라

壬亂倭亂 때 아우 崔辰虎(최진호)와 함께 아버지 義敏公 崔 均의

휘하에 있으면서 調兵(조병) 給食(급식)을 맡아 전투에 참가하니

주변에서 稱讚(칭찬)하기를 兄弟는 가히

忠君愛親(충군애친)이라 하였다.

 

崔 涉(최 섭)

 

字는 德璿(덕선)이요 號는 晩海(만해)이다.

縣監 崔祥岳(현감 최상악)의 아들로서 일찍이 武科 及第하고

河東府使(하동부사)로 있을 때에 百姓(백성)들로부터 많은 稱讚을 받았고

代代(대대)로 守民官(수민관)에 있으면서도 寒士(한사)와 같이 검소하게

지냈으며 또한 書藝(서예)에 能(능)하였다.

 

崔東換(최동환)

 

字는 聖翰(성한)이요 號는 晩菊軒(만국헌)이다.

性品(성품)이 과묵하고 學問에 힘쓰고 杜門自守(두문자수)하며 살았다.

著書는 晩菊軒 詩文集(만국헌 시문집)이 있다.

 

崔圭升(최규승)

 

字는 聖可(성가)요 號는 泗陽(사양)이다

高宗 戊午(고종 무오)에 文科 及第하여 正言(정언) 持平(지평)을

歷任하였다.明倫當(명륜당)에서 王을 모시고 經書(경서)를 하고

詩를 지음에 王이 稱頌(칭송)하여 御定四部手圈 十二冊

(어정사부수권 12책)을 하사하였다.

時局(시국)이 크게 변하자 官職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經籍(경적)을 읽으며 지냈다.

 

崔正基(최정기)

 

字는 肅仲(숙중)이요. 號는 可川(가천)이며, 西山 金興洛

(서산 김흥락)의 門人이다. 일찍부터 학문에 힘써서

大儒(대유)가 되었다. 性理學을 깊이 연구하여 著書가 많으며

西山門中(서산문중)에서 수제자로 알려지고 中庸說(중용설),

心說考證(심설고증), 聖學總要(성학총요) 등과

文集 八卷(8권)이 세상에 전한다.

 

崔東翼(최동익)

 

字는 汝敬(여경)이요. 號는 晴溪(청계)이며,

西山 金興洛의 門人이다.

學文에 힘써서 左國 韓歌家(좌국 한가가)를 다 보고,

다시 古聖賢(고성현)의 語義(어의)를 이해하고 齊川齋(제천재)에서

書生(서생)을 모아 가르치니 사방에서 많은 문하생이 모여 들었다.

著書로 晴溪文集 十卷(청계문집 10권)이 있다.

 

崔宇淳(최우순)

 

字는 舜九(순구)요. 號는 西扉(서비)라, 學德(학덕)이 있어

儒林(유림)의 존경을 받더니 庚戌屋社 後(경술옥사 후)에

倭의 록을 물리쳐 받지 않고 殉義(순의)하였다.

士林(사림)이 殉義碑(순의비)를 세우고 滄江 金澤榮

(창강 김택영)이 義士傳(의사전)을 지었다.

 

崔命熙(최명희)

 

字는 禹敎(우교)요. 號는 曉當(효당)이다.

才思(재사)가 뛰어나고 西山 金興洛에게 學文을 배웠다.

유학자인 晦峰 河謙鎭(회봉 하겸진)과 重齊 金滉(중제 김 황)과

사귀었으며 사리에 밝아 宗中(종중)과 儒林에 大事(대사)가

있으면 公의 처결만 바랐다.鐵城誌(철성지)를 편찬하고

著書로 文集 六卷(6권)이 세상에 전한다.

 

崔弘模(최홍모)

 

字는 文擧(문거)요. 號는 心泉(심천)이다.

經史(경사)에 능통하고 道學(도학)을 베풀어서 儒生을 가르치니

세인의 尊敬을 받았다.

著書로 心泉文集 五卷(심천문집 5권)이 있다.

 

崔禎模(최정모)

 

字는 道敏(도민)이요. 號는 春湖(춘호)다.

經史에 능통하고 志操(지조)가 굳으며 庚戌合邦 後

(경술합방 후)에 倭政(왜정)을 피하여 압록강을 건넜다가

다시 還鄕(환향)하여 恨(한)을 품고 世上(세상)을 마쳤다.

朝鮮歷代年表固城誌(조선역대연표고성지) 小學節要

(소학절요)를 편찬하고 詩文集을 출간했다.

 

崔龍角(최용각)

 

文成公의 次子로

公은 어려서부터 활달하며 勇猛(용맹)하였고, 글도 잘했다.

과거에 壯元(장원)을하고, 벼슬은 寶文閣 大提學(보문각 대제학: 예술원장)

까지 올랐고 뒤이어 儉校大護軍(검교대호군: 대원수급)에 오르셨다.

후에 左相(좌상 : 부총리)에 오르고, 文忠公이란 諡號를 받으셨다.

公의 업적은 完山誌(완산지: 지금으로 치면, 전주시 역사서)에

기록되었다.

 

忠節이 뛰어나 三綱錄(삼강록 : 충신, 효자 열녀의 기록책)에도

올라있다. 陽川許氏(양천허씨)와 결혼하였는데

中護軍 許瑄 (중호군 허 선)의 따님이다.

 

公은 四男二女를 두셨으니

長男 邕(옹)은 版圖司典書(판도사전서: 재무부 이사관급)를 지냈고

次男 哲(철)은 高麗朝 版圖典書(고려조 판도전서)를 지내시고

朝鮮朝 隱逸判書(조선조 은일판서)로 國法(국법)을 制定(제정)

하신분이며 三男은 瓊(경)이요 四男은 粹(수)인데, 자손이 없다.

長女는 張必仁(장필인)에게 출가했고

次女는 按廉使인 崔元之(최원지/ 화순최씨)에게 출가했다.

 

公의 墓所는 全羅北道 完州郡 東上面 大雅里(동상면 대아리)에 모셔져

있는데 公의 墓所는 대아댐 증축으로 인하여 대아 저수지의 물이 公의

陰宅(음택)에 이르게 됨으로 원래 자리에서 약 10미터 가량

흙을 쌓아 올리고, 封墳(봉분)을 造成(조성)하여 물이

侵犯(침범)하지 않도록 防水擁壁(방수옹벽)을

둘러서 모셔지고 있다.

 

公의 墓所 뒷 편 산 아래에 大雅齋(대아재)를 건립하고 享祀는

始祖 文成公 時享日(양력 삼월 끝 일요일) 다음 날인

月曜日(월요일) 이다.

 

崔 哲(최 철)

 

大護軍公 崔龍角의 次子

號는 菊村(국촌), 諡號는 文簡公(문간공)이며

李太祖(이태조)가 세 번이나 벼슬길에 나오기를 간곡히 부탁했으나

나가지 아니했다. 太宗(태종)때 太宗의 권유로 비로서 벼슬길에

올랐으며 版圖典書 黃 喜(판도전서 황 희)와 더불어 國法을

制定하고 隱逸判書(지금의 무임소장관)을 지냈다.

 

公의 墓所는 朝鮮 建國(조선 건국)의 王師(왕사)인 無學大師

(무학대사)가 미리 점지 했다는 父親 大護軍公 墓所

바로 아래에 모셔져 있다.

 

◁ 정말 신통한 전설이기에 소개합니다 ▷

 

菊村先生은 생존에 無學大師와 交分이 깊으셨으며 평소

서로 尊敬(존경)하며 學文과 思想(사상)을 論(논)하시던 사이셨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大師님께서 菊村先生의 墓자리를 잡아주신다 하셨는데

당시 大師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 자리는 분명 明堂(명당)이로되

장차 菊村(국촌) 道袍(도포)자락이 물에 찰랑거릴 즈음이면

그 보다 훌륭한 자리는 다시 없을 것이다 라고 하셨답니다

 

지금 댐 증축으로 수면이 올라와 흙을 쌓아 올리고,

防水擁壁을 둘러서 封墳을 造成하여 물이 侵犯하지 않도록

모셔지고 있으니 이 얼마나 기이한가!

 

崔孟良(최맹량)

 

大護軍公 崔龍角의 四世孫으로

太宗 戊子年(무자년) 식년, 文科에 生員으로 及第하여

正言을 거쳐 監務(감무)를 역임한 후 事狀官(사장관)으로서

明나라에 使臣으로 다녀와 直提學을 지냈다.

 

崔信漢(최신한)

大護軍公 崔龍角의 三世孫 崔自進(최자진)의 四子로

世祖 丙戌年(세조 병술년) 文科 生員丙科(생원병과)에 及第하였다.

成宗 二年 六月(성종 2년 6월)에 全羅監察史(전라감찰사)의

報告(보고)에 「生員 崔信漢 自少事親至孝

(생원 최신한 자소사친지효) - 이하 생략 - 」

즉 생원 최신한은 어려서부터 어버이에 대한 효도가 지극했고

 

그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산소 밑에 여막을 짓고 3년간을

하루 같이 슬퍼했으며 또한 어머니를 20여 년 동안

온 정성을 다하여 지성으로 봉양했고 어머니 돌아가신 후

또다시 산소 밑에 여막을 지어 3년간 애도하였으니

吏曹(이조)와 兵曹(병조)에 명하여 그 재주에 따라 등용하여

주기를 成宗에게 아뢰니 成宗임금이 윤허하였다.

그 後 監察을 거쳐 順安縣令(순안현령)을 지냈다.

 

崔汝霖(최여림)

 

大護軍公 崔龍角의 六世孫으로 崔坎孫(최감손)의 二子이다.

號는 道軒(도헌)으로濟州牧使(제주목사), 副護軍(부호군),

大護軍, 丞旨(승지)를 거처 大司憲(대사헌)을 追贈받았다.

선조 34년 왕이 명하기를 여러 제상 중에 청백리를 아뢰라 하니,

領相 李恒福(영상 이항복)이 前 王(전 왕)때의 청렴한 사람들을

뽑는 것이 좋겠다고 하니 宣祖(선조)가 이를 윤허하였다.

 

이에 使官(사관)이 말하기를 前 領議政 李元翼

(영의정 이원익)은 일편단심 나라에 忠誠으로 奉恭(봉공)하였으며

털끝만큼도 사욕이 없어 일생을 고생하였고

崔汝霖은 武人(무인)인데도 근신하고 청렴결백하여

평생을 하루같이 지냈으며 文士(문사)도 가히 따르지 못할 것이다

하니 유성룡, 이원익, 김 쇄, 이광정, 성 녕, 최여림 등이

청백리로 뽑혔다.

 

崔龍甲(최용갑)

 

文成公의 三子로

公은 어려서부터 英特 聰明(영특 총명)하시며 學問을 좋아하셨다.

少年登科(소년등과)로 進士試(진사시)에 壯元한 後

忠肅王(충숙왕:고려 27대왕 / 1320) 七年 九月(7년 9월)에 大科

文科 壯元 及第하여 大碩學(대석학)들의 總望(총망)이 두터웠다.

忠肅王 十年(1323) 十二月에 弱冠(약관)의 나이로

元나라의 국가 고시에 巨儒(거유), 安軸(안축), 趙廉(조렴)과 함께

國家代表(국가대표)로 참가하여 元나라의 거유들과 中制科 科擧

(중제과 과거)를 치러 당당히 及第한 後

銀甁(은병) 50량과, 白米(백미) 100석을 賞(상)으로 받았다.

 

該博(해박)한 知識(지식)과 元나라에서 얻은 見聞(견문)과 氣量

(기량)으로內,外職(내, 외직)에 奉職(봉직)하는 동안

公正無私 勞力(공정무사 노력)한 結果(결과) 高麗 最高級官職

(최고급 관직)인 吏部尙書(이부상서),

判事,三重大匡(정일품공신)까지 올랐다.

 

配位(배위)인 貞敬夫人(정경부인)은 紆州黃氏(우주황씨/전주황씨)로

給事中(급사중 : 총리 실무이사관) 黃 老(황 노)의 따님이다.

判事公은 五男妹(5남매)를 두셨으니

長男 濚은 翰林(한림 : 부이사관급) 벼슬을 했는데

그 後孫은 慶尙北道 大邱 壽城區(수성구) 凡勿洞에 100여호가 살고

次男 福生은 副正(부정 : 이사관급)을 지냈는데

 

子孫은 全羅北道 茂州郡 茂豊面 철목리 일대에 100여호가 살고 있다.

長女는 部令(부령 : 서기관급) 宋 珣(송 순/여산송씨)에게 출가했고

次女는 庶尹(서윤: 부시장)인 李文守(이문수/고부이씨)에게 출가했으며

三女는 中樞府使(중추부사 : 장관급)인 李 蒙(이 몽)에게 출가했다.

公의 墓所는 失傳되어 全羅北道 完州郡 所陽面 竹節里 분토동

先塋(선영)의 齋室 周德齋 오른쪽 터에 壇을 모셨다.

 

※ 판사공의 선계(先系)는

 

王族 全州李氏(전주이씨) 族譜에 의하면

李 蒙의 婦人(부인)이 判事公의 따님인데

丈人(장인)이 直提學 龍甲이요.

 

祖父는 侍中 文成公 阿요.

曾祖는上護軍 立枰이라 記錄되어있다.

※ 全州李氏의 族譜를 撰한 분이

工曹判書(공조판서)를 지낸 安 止(안 지)인데

禑王(우왕:1365~1389)三年에 나서

世祖(세조:1455~1468)十년(서기 1464)에 돌아가신 분이다.

 

按止는 李蒙의 同壻 宗珣(동서 종순)의 六남

宋忠孫(송충손)의 사위이다.

 

崔福生(최복생)

 

判事公의 二子로

副正을 지냈으며 副正公의 子 溫之(온지)는

文科 及第하고 郡事(군사)를 歷任하였다.

溫之의 子 以和(이화)는 兵馬節都使(병마절도사)를 歷任하고

이어 縣監(현감)을 지내었다. 公의 墓所는

全羅北道 完州郡 龍進面(용진면)에 있다고 하나

失傳으로 設壇祭享(설단제향)하고 있다.

 

崔守平(최수평)

 

崔以和의 子로

檢知(검지) 中樞院事(중추원사), 濟州牧使(제주목사),

世祖大王 六年 五月 十六日 三等功臣 正三品(3등공신 정3품)을

지내었으나 墓所를 失傳하여 壇閣 祭享을 하다가

1974년 全羅北道 完州郡 伊西面 上林洞(이서면<지금은 전주시 완산구>

상림동)에 있는천견산 甲坐(갑좌)를 發見(발견)

碑를 세우고 墓祀를 올리고 있다.

 

崔漢卿(최한경)

 

判事公 六世孫 崔文孫(최문손)의 長子로

忠淸監司(충청감사), 江原監司(강원감사), 吏曹參議(이조참의),

靖國功臣 三等(정국공신 3등)을 歷任했다.

壇閣 拜享(단각배향)

 

崔進江(최진강)

 

判事公 十三世孫으로 順天府使(순천부사),

定平府使(정평부사), 熊川縣監(웅천현감), 安州牧使(안주목사)

그리고 宗簿寺僉正(종부시첨정)을 歷任하였다.

 

崔 活(최 활)

 

判事公 十三世孫 崔進江의 子로

字는 淸原(청원)이요. 號는 竹軒(죽헌)으로 孝誠(효성)이

지극함을 하늘도 아는 이름난 孝子(효자)로 표범과 범이

보호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學識 또한 높아 世人의 尊敬을 한 몸에 받았으며

壬亂倭亂 때에는 書川君 鄭崑壽(서천군 정곤수)가 쓴 행장문집에서

學文이 境地(경지)에 到達(도달)하였고 선비의 資質(자질)은

사해에 떨친다고 記錄하고 있으나 不行(불행)하게도

이 文集(문집)이 失傳되어 안타깝다.

仁祖(인조) 20년 壬午(임오/1642) 享年 七十三世

(73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

 

崔 浩(최 호)

 

字는 濬原(준원) 號가 黙齋(묵재)로

從士郞(종사랑)을 지내고 性理學의 大家(대가)로 이름났다.

나라에서 벼슬을 주었으나 나가지 아니하고,

學問에만 熱中(열중)하시다 돌아가시매

그를 따르던 선비들은 孔子, 孟子 以後 大文丈

(공자, 맹자 이후 대문장)인 큰 별이 떨어졌다고 하였다.

 

崔龍鳳(최용봉)

 

文成公의 四子로

公은 浪漫(낭만)적이고 抒情(서정)적이어서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中郞將(중랑장 : 령관급)에 머물었다.

그러나 천성이 英敏(영민)하고 뛰어난 才質(재질)과

精氣(정기)는 後孫들에게유전되어 孫子 霮(담)이

提學(제학 : 학술원 회원)이요

曾孫 匡之, 直之(직지), 德之, 久之(구지)가 提學이니

五提學(5제학)이 一家(일가)를 이루었다.

특히 烟村公 德之는 文宗(문종)도 公의 威嚴에 承服(승복)하였고

文宗이 높이 등용하려는 것을 후배에게 양보하고, 靈岩 月出山(월출산)

아래에서 育英(육영)에 힘쓴 湖南 道學者(호남 도학자)이다.

婦人은 光山李氏(광산이씨)로, 藝文館(예문관)

提學 李先齊(이선제)의 따님이다.

 

公은 七兄弟를 두셨으니

長男인 乙仁(을인)은 司醞署 直長 同正(사온서 직장 동정)을 했고

次男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의)는

漢城尹(한성윤 : 서울시장)을 지냈고

三男은 瑞(서)이며

四男 翊(익)은 監務(감무 : 군수)를 재냈고

五男은 仲車(중거) 六男은 安福(안복) 七男은 安壽(안수)이다.

 

墓所는 全羅北道 完州郡 所陽面 竹節里 周德山 이라 전하나

失傳하여 周德齋 齋室 뒤 언덕에 壇을 모시고 祭祀를 올린다.

時祭는 陰歷 三月三日(삼짓날)이다.

 

崔 霮(최 담)

 

司醞 同正公 崔乙仁의 長子로 號가 月唐이다.

高麗 恭愍王(공민왕) 때 文科 及第하고 珍州事(진주사),

檢校 등을 거쳐 工曹參議(공조참의)를 歷任한 後 提學을

지내셨다.뜻한 바 있어 벼슬을 버리고 全州로 落鄕

玉流洞(옥류동) 맑은 냇가 奇岩(기암) 위에 집을 지었는데

이름을 寒壁堂(한벽당)이라 하고 陽村 權 近(양촌 권 근),

節齋 金宗瑞(절재 김종서),晩六堂 崔 瀁(만육당 최 양) 등과

交流(교류)하면서 學文과 風流(풍류)로 悠悠自適하셨다.

 

寒壁堂에서 산 위로 조금 올라가면 參議井(참의정)이란 우물이 있다.

玉流洞 냇가 위의 寒壁堂은 지금도 全州에서 遺跡地(유적지)로

이름 나 있다. 全州市 豊南洞(풍남동) 은행나무집은 古家(고가)인데

이 곳이 바로 全州崔氏 宗岱(전주최씨 종대)로 月唐公이

여기서 많은 弟子(제자)들에게 學文을 講論(강론)하던 곳이다.

이 곳의 은행나무는 樹齡(수령)이 六百餘年(600여년)이나 되는데

지금도 道 文化財(도 문화재)로 指定(지정)되어

全州市에서 管理(관리)하고 있다.

 

月唐公께서 네 아드님을 두셨는데,

長子 崔匡之는 號가 松山(송산)이요 諡號는 文簡이다.

高麗 禑王 때 文科 及第하고 太宗(태종) 1년 集賢殿(집현전)

提學을 지내셨다.次子 崔直之는 號가 松坡(송파)로 高麗 禑王 때

文科 及第하고太宗 1년에 左右拾遺(좌우습유)가 되어

羅州判官(나주판관)을 歷任했으며 淳昌都事(순창도사)로

在任 中(재임 중) 돌아가셨다.

 

三子 崔得之는 號가 栗軒(율헌)이고 諡號는 孝烈(효열)인데

十八世에 進士試(진사시)에 合格(합격)하고 主簿(주부)를 거쳐

司憲府 監察(사헌부 감찰)을 歷任한 後

여러 고을의 守令(수령)을 지내셨다.

後에 漢城府 典農少尹(한성부 전농소윤)을 지내셨다.

崔德之(최덕지)

 

月唐公의 四子로 字가 于叟(우수) 號는 烟村 또는 存養堂(존양당)

諡號는 文肅(문숙)이다.太宗 五年(태종 5년/1405) 式年(식년)

文科 進士科에서 及第하여 學行(학행)으로 推薦(추천)받아

史官(사관)이 되었고 1409년에는 敎書館正字(교서관정자)로

전임되었으며 뒤이어 金堤部事(김제부사)가 되어

珍味(진미)하나를 進上(진상)하여 太宗으로부터

馬(마:말) 한 필을 下賜(하사) 받았고

그 後 南原府使(남원부사) 在任 中 士禍(사화)로 사회가

혼탁하니 영암으로 내려가 學問에 精進(정진)하였다.

 

1450년에 다시 藝文館(예문관) 直提學이 되었으나

老齡(노령)으로 사직하고 靈岩의 永保村으로 내려가셨다

道學(도학)으로 全州 西山祠(서산사) 南原의 舟岩書院

靈岩 鹿洞書院에 拜享되셨다.

 

崔久之(최구지)

 

漢城公 崔의 孫으로 字는 恒甫(항보)

諸子百家(제자백가)에 能通(능통)하였고 특히 易學에 能하여

直提學을 지내었다.

 

崔生明(최생명)

 

提學公 崔匡之의 長子이며, 號는 甕庵(옹암)으로

文宗 때 烟村公과 함께 벼슬을 하시다가 烟村公을 따라

靈岩으로 내려갔다. 당시 湖南 需林에서는

學問과 德望이 높기로 稱頌이 자자했다.

德學(덕학)으로 扶安의 甕井書院(용정서원)에 祭享되었고

墓所도 이 곳 석동에 모셔서 後孫들은

扶安宗中(부안종중)을 이루고 있다.

 

崔忠成(최충성)

 

烟村公의 孫으로 號는 山堂書客(산당서객)이다.

戊子(무자:世祖 13년)에 出生(출생)하여 光州(광주)에

世居하였으며 寒碧堂 金廣弼(한벽당 김광필)의 門人으로

스승으로부터 學問을 위해 태어난 大家라는 稱讚을 들었으며

李勣 尹 信(이적 윤 신)과 더불어 이름을 나란히 날린 선비이다.

 

金宗直(김종직)이 일찍이 湖南을 巡視(순시)할 때

公이 글을 올려 무당과 부처의 폐를 진언하고 막아주기를 청하니,

그가 禮로써 대하였고 본시 벼슬에 뜻이 없어 山川(산천)을

유람하다가 燕山 7년 辛酉에 돌아가시니

秋江 南孝溫(추강 남효온)은

世上에서 제일 친한 벗이요, 가장 善한 선비로 재질을 아까워 하며

슬퍼했다고 한다. 文集으로 山堂集(산당집)이 있으며,

靈岩의 鹿洞書院에 祭享되었다.

 

崔希汀(최희정)

 

直提學公 崔 汾(최 분)의 孫으로 號는 德村(덕촌)으로

精菴 趙光祖(정암 조광조)의 門人이다.

中宗 때 武科 及第하여 鍾城判官(종성판관)이 되었다.

당시 女眞의 賊古來(족고래)가 침입했을 때에

朝廷(조정)에서 公에게 鍾城判官을 除授하여 敵을 막게하므로

公이 軍兵을 訓練(훈련)시켜 兵仗器(병장기)를 갖추어 적을 맞아 싸워서

大破하고 甲山, 江界, 渭原(갑산, 강계, 위원) 등지를 평정하니

朝廷에서는 陞進(승진)시키고 田畓(전답)을 賞으로 주었으나 받지 않았다.

돌아가신 後에 兵曹參判에 贈職되시고,

古阜 西山詞(고부 서산사)에 祭享되셨다.

 

崔命龍(최명룡)

 

甕庵考 崔生明의 孫으로 字가 汝允(여윤)이고,

號는 石溪(석계)이다. 甲重慶(갑중경)의 門人으로

邊山(변산)에 있는 절에서 修學(수학)했으며 金長生(김장생)과

交遊(교유)했고 諸子百家에도 能通했으며 易學, 陰陽, 方技佛敎經文

(방기불교경문)까지 精通(정통)하셨다.

英祖 21년 7월 吏曹判書 李周鎭(이주진)이 上訴(상소)

하기를 仁祖大王(인조대왕)이 庶子(서자)를 가둔 것은

古今天下(고금천하)에 없는 惡法(악법)이며

성왕도 公明正大(공명정대)한 政治가가 아니라 했다.

 

옛 宰相 遲川公 崔鳴吉(재상 지천공 최명길)이 역시 上訴하여

仁祖大王의 允許(윤허)를 얻었으나 三府 官廳(3부 관청)과

各司(각사)에서 말이 많아 先王 때 朴世采(박세채)가

인물을 천거해도 庶子란 이유로 중론만 많고

실행되지 않았으며 혹 선발된 사람들이 있어도 地方(지방)으로

左遷(좌천)시켰으니 재주 있고 뛰어난 人物(인물)들을 일일이 들 수는

없으나 그 중에서도 宋翼弼(송익필)의 經學(경학)과 朴芝華(박지화)의

節義(절의), 申喜溪(신희계)의 文章崔命龍의 智略(지략), 楊士彦

(양사언)의詩歌(시가)는 뛰어났어도 끝내 수포로 돌아갔고

혹 큰 그릇이 있어도 말단 관리로 있었으니 슬프고 민망하다하여

사방의 뛰어난 재주를 가진 사람들을 登用(등용)하여

勇氣(용기)를 북돋우고 나라에 忠誠하도록 하여 주기를 懇(간)하였다.

贈職으로 大司憲(대사헌)을 받았다.

 

全州 麟山書院(인산서원)과 扶安 甕井書院(옹정서원)에 祭享되셨다.

특히 海東名臣言行錄(해동명신언행록)에 烟村公 및 遲川公과 함께

登載(등재)되었다.

 

崔弼成(최필성)

 

進士公 崔秀孫(최수손)의 子로 字는 오卿(오경)이다.

1507년 進士試에 及第하고 戊午士禍(무오사화)를 당하여

隱居(은거)하였다. 全羅監司 柳 灌(전라감사 유 관)은

中宗 21년 임금에게 扶安에 사는 進士 崔弼成은

어미가 乳腫(유종)을 앓고 있을 때 藥(약)을 써도 낫지 않으므로

弼成의 입으로 빨고 핥아서 乳腫을 고쳤고

또 進士인 아버지 秀孫이 악질 병으로 여러 날을 고생하여

百藥(백약)이 무효하나 의사가 박쥐를 구하여 사용하면 낫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때마침 겨울철이라 求(구)할 수가 없어

하늘만 보고 통곡을 하니 박쥐가 날아와 公은

그 박쥐를 잡아 약으로 다려 복용케 하니

아버지의 病(병)이 나았다.

 

이를 가상히 여겨 狀啓(장계)를 올린다고 했고,

또한 中宗 23년에 禮祖(예조)에게 아뢰기를

扶安 進士 崔弼成은 父母가 생존했을 때에 효도가 지극함은 물론

돌아가신 後에도 大小喪(대소상)의 禮를 다하고 墓下(묘하)에

여막을 지어 侍墓(시묘)하였으므로

賞으로 직책을 주는 것이 타당하다 하였고

 

명종 15년에 예조에 아뢰기를

扶安 進士 崔弼成은 그 효행이 지극함은 물론 예의범절이

타의 모범이 되어인근 주민들의 대상이 되어 오던 중

벼슬을 받기도 전에 죽었으니 旌閭(정려)를 세워주고

찬양하여 이후에 세상의 귀감이 되도록 해줌이

좋겠다고 하니 명종임금이 이를 윤허하였다.

孝行과 文章 道德이 높아 扶安 甕井書院에 祭享되었다.

 

崔世榮(최세영)

 

烟村公의 三子 進士公 崔 淑의 孫인 監察公 崔世榮은

典性署參奉(전성서참봉)과 寧陸寢郞(영육침랑)을 거쳐

三嘉縣監(삼가현감)으로 在任 中 善政을 베풀어

頌德碑(송덕비)가 세워졌다.그 後 司憲府 監察을 지내고

嘉善大夫(가선대부), 戶曹參判(호조참판)을 贈職받았다.

특히 全州崔氏 團合(단합)을 위하여 文貞公 崔 宰(문정공 최 재),

淸白吏公 崔 寬(청백리공 최 관)과 監察公 崔世榮은 많은

宗人들을 公州 鷄龍山 東鶴寺(공주 계룡산 동학사)에 모이게 하여

여러 날 門會(문회)를 개최하고 토의하였으나 異論(이론)이 많아

아깝게도 單一化(단일화)하지 못하게 되자

文成公系에서는 文成公 崔 阿 以下(이하)

收單(수단)을 모아 文成公系 大同譜를 만들었다.

 

崔汝信(최여신)

 

字는 玄應(현응), 號는 淸虛. 西山, 아명은 汝信, 속성은 崔氏로

9세에 부모를 여의고 安州牧使 李思曾(안주목사 이사증)의

양자로 입적 후에 양부를 따라 상경을 했다.

智異山(지리산)에 들어가 崇仁(숭인)에게서 중이 되고,

傳燈錄(전등록), 華嚴經(화엄경), 法華經(법화경) 등을 배웠다.

그 後 明宗 四年(1549) 僧科(승과)에 及第하여 判敎宗事(판교종사)가

되고 普雨(보우)의 後任(후임)으로 奉恩寺 住持(봉은사 주지)가 되었다.

1592년 壬亂倭亂 때 王의 特命(특명)으로 八道十六宗都摠攝

(팔도십육종도총섭)이 되어 全國(전국)에 檄文(격문)을 돌려 僧兵(승병)

1천5백을 규합, 이들의 總帥(총수)가 되었다.

 

1594년 제자 惟政(유정)에게 병사를 맡기고 妙香山 圓寂庵

(묘향산 원적암)에서 여생을 보냈다.

 

朝鮮 佛敎의 高僧으로서

禪宗(선종)에 敎宗(교종)을 포섭함으로써 이후 조선 불교는 禪宗인

曹溪宗(조계종)으로 일원화 되었다.

한편 儒, 佛, 道가 궁극적으로는 일치한다고 說(설)하여

三敎統合論(삼교통합론)의 기원을 이룩했다.

妙香山 安心寺(안심사), 金剛山 楡岾寺(금강산 유점사)에 浮圖(부도)가

세워지고海南(해남), 密陽(밀양)의 表忠寺(표충사)에 祭享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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