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전 한국 -서울과 궁궐, 평양과 성곽 이야기
남문을 열고 파루를 치니
서울의 궁궐, 그리고 평양의 고적이나 풍경사진으로 꾸몄다.
한말부터 1910년 전후의 관련 사진이 그간 적지 않았지만,
여기에 소개되는 사진은 그 각도나 내용에 차이가 있어
느낌이 새롭다.
궁궐은 임금이 사는 곳이다. 임금은 궁궐에서 정무를 보며
일상생활도 했다. 서울에는 정전(正殿)인 경복궁을 비롯해
창덕궁·창경궁·경운궁(덕수궁)이 있었다. 궁궐에 관한 사진은
대부분 건물을 찍은 것이어서 경복궁의 강녕전과 집옥재, 건청궁
일부와 향원정을 볼 수 있다. 100년 전 창덕궁 후원의 연못과
정자·누각, 덕수궁의 원경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궁중 연회 뒤에 여악과 악사가 귀빈을 모시고 찍은 사진이다.
건물의 상당수가 수리와 복원을 통해 오늘날까지 남아 있지만,
막상 100년 전 시점에서 보니 특별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듯하다.
서울 시내를 담은 사진은 크게 오래된 고적들, 100년 전 그 시절에
지은 건물, 그리고 풍경을 포함한 생활상으로 나눌 수 있다.
의정부·돈의문(서대문)·흥인지문(동대문)·원각사 석탑·원각사비·
관왕묘·석물 등은 당시까지 남아 있던 고적들이다.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비는 1902년 세워진 것이고, 대관정·
독립문·독립관·영국공사관·러시아공사관 등은 1890년대에
지은 건물이다.
통감관저·경성우편국·일본군 사단사령부·대한의원 등의 건물은
1900년대에 일본이 한국침략과 관련해 건립한 것들이고,
경성이사청은 1896년에 영사관으로 지은 것이다. 독립관을
제외하면 모두 서양식 벽돌건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한강철교도 1900년에 완성되었다. 이외에도 서울의 동네풍경을
담은 사진,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는 사람들, 꽁꽁 언 한강에서
낚시하는 장면은 당시 평범한 서울 사람의 생활을 잘 보여준다.
독립문과 독립관은 널리 알려진 대로 한국의 자주독립을 목적으로
서재필(徐載弼)이 주도하던 독립협회에서 건립했다.
러시아공사관은 1896년 고종이 1년을 머문, 이른바
아관파천(俄館播遷)의 배경이 된 바로 그 건물이다.
공사관을 제외한 근대 건축물은 대부분 일본인이 세운 것이었다.
침략의 양상이 건물로도 확인되는 셈이다.
평양은 고구려의 수도였고 고려시대에는 서경이라 칭하며
중요시했으며, 조선시대에도 관찰부가 있던 유서 깊은 도시이다.
군사적으로도 요충지여서 평양성을 둘러싼 문을 공들여 쌓았고,
대동강 주위에는 아름다운 정자며 누각이 많다. 그러나 평양은
남북이 분단된 이후 쉽게 가볼 수 없는 곳이 되었다.
먼저 평양의 성문을 하나하나 담은 사진이 있다. 대동문·칠성문·
현무문·전금문 등이 그것이다. 또 부벽루와 을밀대·득월루·연광정
같은 정자들이 대동강의 풍광을 배경삼아 빼어난 자태를 자랑한다.
이들 성문과 누각·정자는 현재 남아 있거나 복원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자릉을 담은 사진도 있다.
서민들이 대동강에서 빨래를 하고 얼음을 채취하는 모습도 사진에
담겼다. 서울에서 한강이 그러했듯, 평양의 일상이 대동강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일본인이 평양에
세운 이사청 건물과 일본인 거류지는 물론 대동강 철교까지
한국침략의 한 방편이었다. 이들 사진을 빼면 근대화된 풍경을
담은 사진은 없다. 한국의 ‘근대’는 사진을 촬영한 일본인에게는
관심사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서울의 궁궐과 유적, 또 평양의 성문과 누정을 비롯한 고적은
모두 눈에 익숙하다. 수천 년의 나날들에 비하면 60년 분단의
세월은 순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 사진들은 말해준다. 대동강변
부벽루를 산보하는 날이 어서 오기를 기대하는 것이 어디
한 사람의 꿈일까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