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6.25 전쟁 당시 모습들)
6·25사변이라고도 하며, 국제적으로는 한국전쟁이라는 용어가 통용되고 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될 때까지 전투행위가 계속되었다.
배 경
개 요
6·25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한반도 분단의 결과이며,
한반도의 분단은 급조된 미국의 정책결정 때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진행중이던 1943년 11월 27일 미국·영국·중국 등
3개국의 정상이 참석한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일본 예속은 부당하다고 인정하고
적절한 시기에 한국을 독립시키기로 합의했으며, 1945년 2월 얄타에서 개최된
미국·영국·소련 등 3개국의 정상회담에서는 일본이 항복한 후 한반도는
미국·영국·중국·소련 등 4개국에 의한 일정 기간의 신탁통치를 거친 후
독립시키기로 합의가 이루어졌다.일본의 군사력을 과대평가한 미국은 일본 본토에
상륙시에 일어날 막대한 인명피해를 우려하여 소련의 조기참전을 요청했다.
그러나 소련은 참전을 계속 지연시켜오다가 미국이 히로시마[廣島]에 사상 최초의
원자폭탄을 투하한 지 2일 후인 1945년 8월 8일 대일선전포고와 더불어 만주일대에서
한반도를 향하여 진격하기 시작했다. 미·소 양측이 우려했던 일본 관동군은 극히 약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소련군은 예상 외의 빠른 속도로 남진할 수 있었다. 당시 미군은 한반도에
제일 가까이 위치하고 있는 부대가 오키나와[沖繩]와 괌 일대에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이 한반도 전역을 점령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북위 38˚선을 미군과 소련군의 경계선으로
정하고 그 북쪽에는 소련군이, 남쪽에는 미군이 진주하여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키기로 제의했다.
소련이 이 제의를 받아들여 한반도는 북위 38˚선을 경계로 미군과 소련군에 분할 점령당하게
되었다(분단국가).소련군은 1945년 8월 22일 평양에 진주했고, 미군 제24사단은 9월 8일
인천에 상륙하여 2일 후 서울에 진주했다. 분할 점령시 미·소 양측은 한반도의 장래에 대한
분명한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시간이 흐름에 따라 분할 점령하고 있는 양측의 의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미국은 북위 38˚선을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한 잠정적인 것으로
설정한 반면,소련은 북위 38˚선을 정치적인 경계선으로 항구화시켜
그 북쪽을 소비에트화하려고 했다.
미군과 소련군은 당면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미소공동위원회(US-USSR Joint Commission)를
구성하고 1946년 3월과 1947년 5월 서울에서 회의를 개최했으나 합의점을
찾지 못함에 따라 한반도문제는 1947년 9월에 국제연합(UN)으로 이관되었다.
UN에서는 한반도 문제를 취급하기 위하여 UN 한국임시위원단
(United Nations Temporary Commission on Korea/UNTCOK)을
구성했다. UN은 제2차 총회에서 통일된 한국정부 수립을 위해 1948년 5월 31일까지
한반도 전역에서 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의하고 UNTCOK가 선거감시임무를 맡도록 했다.
UNTCOK는 UN 결의에 따라 한반도에서의 선거를 실시하기 위하여 1948년 1월 한반도에
도착했으나 소련군 점령하의 북한지역에는 소련의 거부로 들어가지 못함으로써
UN 총회의 결의는 실현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결국 UN은 감시가 가능한 지역에서의 선거실시를 결의하고, 1948년 5월 31일 미군 점령하의
남한지역에서만 선거를 실시했다. 선거 결과 의회가 구성되고 의회에서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
행정부를 구성하여 1948년 8월 15일 독립을 선포함으로써 대한민국정부가 탄생했다.
북위 38°선 이남에서 UN의 감시하에 대한민국정부가 구성되자 소련은 8월 25일 38˚선
이북지역에서 소련식의 선거를 실시하고 1948년 9월 9일 이른바 조선인민공화국이라는
공산정권 발족을 선포했다. 이로써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목적으로 설정한 북위 38˚선이
제2차 세계대전 후 형성된 냉전체제로 말미암아 최첨단으로 대립하는 가장 긴장된 양극체제의
국경선으로 변했다.북위 38˚선을 경계로 남북한에 2개의 독립된 정부가 들어서면서 남북간의 대립은
더욱 격화되었으며, 이와 같은 대치 상태는 38˚선을 통한 북한 무장공비의 침투사건과
남한 후방지역에서의 공산주의자(빨치산)들에 의한 전복활동으로 나타났다.
정부수립 이전인 1946년 9월 서울에서의 철도파업, 10월 대구폭동, 1948년 제주 4·3사태와
그 후의 한라산 일대에서의 게릴라전 등을 비롯하여, 1948년 10월 20일 여순반란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