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정렬(貞烈)[8]
ㅇ 천씨(千氏)
천씨는 휘 수련(水連)이고 영양인 천명석(千命錫)의 딸이며 전주인
최규석(崔圭錫)의 처이다. 천씨는 중년에 남편을 잃고 또 아들의 전사(戰死)까지
잇달아 겪으면서도 종부로서 대소가내의 우애돈독과위선봉사의 정성이 지극하여
향리에서 칭송이 자자 하였다.
더구나 넉넉지 못한 재산임에도 집안에서 건립하려는 제청(祭廳) 부지 마련을
위하여 100여평의 부지를산듯 무상기증하여 오늘의 매화정(梅花亭)을
있게한 장본인이다.이 공적을 시종질 원호(元鎬)씨가 비문을 쓰고 매화정 경내에
"유인 영양천씨 공적비(孺人潁陽千氏功績碑)를 세웠다.(현지확인)
(주)최규석(崔圭錫 23世): 해정공 최수강의 후이고 최광보(崔光輔)공의 현손
ㅇ 최씨(崔氏)
최씨는 전주인 최근홍공(崔根洪公)의 딸로 16살에 수원인 백맹기(白孟基)의
처가 되었다.시부모를 지성으로 봉양하고 남편을 공순(恭順)으로 받들었으니
남편의 유질(有疾)에 백약을 구하여 성(誠)으로 치료하며 밤마다 하늘에 기도하며
대신하기를원하였고, 끝내 구명할수 없음을 알자 남몰래 명주실로 목매어 자결을
도모하다가 마침 가인(家人)의 급구(急救)로 절명을 면하자 마음을 돌이켜 말하기를
"사생(死生)은 유정(有定)이니 그대의 죽음을 어찌 막으리오/ 시부모의 종신 봉양도
나의 도리요, 어린 자식의 성취도 나의 임책(任責)이라." 하고 애통의 심정을 가다듬어
상을 마치고ㅅ 시부모의 아픔과 괴로움을 달래며, 생계를 이으니, 시가의 제숙(諸叔)이
따로 가사를 보필하였다. 또한 자식을 선교(善敎)하여 그 문호를 보전하니
향당 인사가 모두 열부요 효부라 칭하였다.(고송문화유적지)
(주)최근홍(崔根洪 20世): 침봉공 최하의 후이고 안락헌공 최태수(崔泰穗)의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