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개 내 (Gaenea)
世德叢覽(全州崔氏 按廉使公 宗會)

9. 효. 열부(孝. 烈婦)-3)정렬(貞烈)[8]- 千氏- 崔氏 - 崔氏 - 崔氏

by joolychoi 2013. 9. 8.

 

 

 

  

세덕총람 (世德叢覽)  

  

  9. 효.열부(孝.烈婦)   

3) 정렬(貞烈)[8] 

 

 

ㅇ 천씨(千氏)

천씨는 휘 수련(水連)이고 영양인 천명석(千命錫)의 딸이며 전주인

최규석(崔圭錫)의 처이다. 천씨는 중년에 남편을 잃고 또 아들의 전사(戰死)까지

잇달아 겪으면서도 종부로서 대소가내의 우애돈독과위선봉사의 정성이 지극하여

향리에서 칭송이 자자 하였다.

더구나 넉넉지 못한 재산임에도 집안에서 건립하려는 제청(祭廳) 부지 마련을

위하여 100여평의 부지를산듯 무상기증하여 오늘의 매화정(梅花亭)을

있게한 장본인이다.이 공적을 시종질 원호(元鎬)씨가 비문을 쓰고 매화정 경내에

"유인 영양천씨 공적비(孺人潁陽千氏功績碑)를 세웠다.(현지확인)

(주)최규석(崔圭錫 23世): 해정공 최수강의 후이고 최광보(崔光輔)공의 현손

 

ㅇ 최씨(崔氏)

최씨는 전주인 최근홍공(崔根洪公)의 딸로 16살에 수원인 백맹기(白孟基)의

처가 되었다.시부모를 지성으로 봉양하고 남편을 공순(恭順)으로 받들었으니

남편의 유질(有疾)에 백약을 구하여 성(誠)으로 치료하며 밤마다 하늘에 기도하며

대신하기를원하였고, 끝내 구명할수 없음을 알자 남몰래 명주실로 목매어 자결을

도모하다가 마침 가인(家人)의 급구(急救)로 절명을 면하자 마음을 돌이켜 말하기를

"사생(死生)은 유정(有定)이니 그대의 죽음을 어찌 막으리오/ 시부모의 종신 봉양도

나의 도리요, 어린 자식의 성취도 나의 임책(任責)이라." 하고 애통의 심정을 가다듬어

상을 마치고ㅅ 시부모의 아픔과 괴로움을 달래며, 생계를 이으니, 시가의 제숙(諸叔)이

따로 가사를 보필하였다. 또한 자식을 선교(善敎)하여 그 문호를 보전하니

향당 인사가 모두 열부요 효부라 칭하였다.(고송문화유적지)

(주)최근홍(崔根洪 20世): 침봉공 최하의 후이고 안락헌공 최태수(崔泰穗)의 자

  

ㅇ 최씨(崔)

최씨는 전주인 최원호공(崔元鎬公)의 딸로 18살에 경주인 박계홍의

처가 되었다. 본래 출천의 행실이 있어 시부모를 잘 섬김으로

들 났드니 얼마후에 시모의 상을 당하여 능히 예제를 다하고 25살에

남편이 난치병을 얻어서 만방으로 구료하였으나 효험을 못 보고

문득 임종시에 이르자 공이 부인에게 후사를 부탁하고 유연히

별세하니, 부인이 따로 죽고자 하였으나 부군의 임종 부탁을 저버리기

어려워서 비통을 참고 시부에게 음식을 권하며 조금도 시부의 뜻을

어김이 없으며 어린 자식을 양육함에 의방(義方)으로 인도하여 가사를

잘 처신하여 집안이 점점 넉넉하였으며 89살로 별세하니, 이웃이 다

그 정열을 칭송하였다.(고성문화유적지)

(주)최원호(崔元鎬) : 의민공 최균(崔均)의 후

ㅇ 최씨(崔)

 

최씨는 전주인 최동원공(崔東源公)의 딸이며 17살에 함안인 이진수

(李鎭洙)의 처가 되었다. 시부모 섬기기를 친 부모와 같이 하였다.

그 후 친가, 시가의 양 부모가 차례로 별세 함에 의지할 곳은 오직

시숙과 동서뿐이더니 불행이 시숙이 또 일찍 별세하고 동서 또한

병석에 누움에 최씨는 엄동설한이라도 목욕재계하고 쾌차를 천신에

기도하였으나 보람도 헛되이 5남 1녀를 두고 별세하니, 이 때 가세가

가난하여 생활이 막연하고 어려운 시기였다.

최씨는 수족이 닳도록 노력하여 마침내 가사를 굳건히 하고 항상 근검,

절약.청렴,화목, 신의의 5계(五戒)를 주로 삼으며 이를 실천함을 목적으로

하였다. 3녀를 두고 아들이 없자 매림천에 7석(七石)을 옮겨 다리를 놓고

매칠석(每七夕)마다 치성을 하였더니 두 아들을 얻었다(고성문화유적지)

(주)최동원(崔東源 22世):의민공 최균(崔均)의 10세 손이고 우묵당공

(遇默堂公) 최광익(崔光翊)의 증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