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는 공헌(公獻)이며 호는 운엄(雲厂)이다.공은 인재공 최현(訒齋公崔睍)의
6세 손이고 송호공(松湖公) 최수인(崔壽仁)의 둘째 아들이다.
공은 어릴때부터 천성이 단정순후하고 침착하여 가르침을 받으면 글 재주가
날로 향상하였다. 1754년 영조 30년 갑술에 백형(崔光玉). 중형(崔光岳),
3형제가 생원시에 급제하니 남이 칭송하기를“ 3련벽(三聯璧)”이라 하였다.
1759년 영조 35년 기묘에 대과(大科)에 급제하니 그 때 연령이 32살이였다.
곧 벼슬을 받아 입시하니 왕이 교시하기를 위인 됨이 정상하다하고 시장원
춘방(春坊)을 명하고 3년이나 시강원 설서(說書:正7品官.왕세자의 글 선생)가
되었다. 1762년 임오에 사도세저가 비명에 가니 공은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여
두문불출하다가, 그 후 주서(注書) 벼슬을 받아 입시하니 왕이 또 교시하기를
주서(注書:正7品官)는 순실(淳實)하가하고 장락주부로 전근시켰다가 다시
사헌부 지평(正5品官)을 제수 하였다. 수백건의 상소문을 올려 왕이 자중자애
할 것을 역설하였다. 이로 인하여 또 사간원 정언(正言)에 제수되고 곧 장령
(掌令:正4品官)이 되었다.이듬해 만경 현감으로 전근되어 학문을 일으키고
백성의 고역을 덜어주니 모두가 가뻐하였다. 경자년에 다시 군자 정에
임명되었으나 모부인 상중에 있었음으로 부임치 못하였다.
정조가 1777년(정유) 왕위에 오르자 장령에 임명하고 곧 통정대부 돈녕부
도정에 임명되었다.1784년 갑진에 공조참의 다음해에 풍천 부사가 되어
충성으로 백성을 다스리고 전염병을 훌륭하게 퇴치하였다.
1789년 기유에 가선대부에 배수 되었고 도총부 부총관, 병조참판이 되고,
1791년 신해에 승정원 죄승지(正3品官)로 제수되었으나
고향에서 부임하지 않으니 경질 되었다.
이 때부터 공은 벼슬에 뜻을 버리고 창산별야(昌山別野)에 이우정(二友亭)을
짓고 자호(自號)를 “雲厂”이라 하였으니 이는 요산요수(樂山樂水)의 뜻을
나타낸 것이다. 말년에 고성에 가서 선산을 수봉하다가 별세하였다.
1996년 8월, 문조 김종길(聞詔 金宗吉)이 찬(撰)한 공의 신도비를
해평면 해평리에 세우고 운엄사(雲厂祠)란 사당을 지어 배향하고 있다.
이 사당의 앞 문액은 숭조문(崇祖門)이며 문액은 이우문(李友門)이라
하였다. (세헌록. 현지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