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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 내 (Gaenea)
가족과 가정에 대하여

玉山齋 (고성군 구만면 화림리 당산마을 소재)

by joolychoi 2011. 12. 18.

 

 

  

세덕총람 (世德叢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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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산(堂山)마을
◎ 동명의 유래(由來)
당산마을은 조선조때에는 외원(外院)으로 부르다가 임란때 전주최씨(崔氏)가 입촌하여 살면시 마을 중간에 독메(야중임야)가 있어 그 독메를 "당산"이라 하였으며 마을명도 당산으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형성(形成)
당산마을이 형성된 것은 서기1519년경(조선조 중종때)에 나주나씨(羅氏)가 맨 먼저 입촌하였고 그뒤에 1623년경(조선조 인조때) 안악이씨(李氏)가 입촌하여 살았으며, 1712년경(임란때)에 전주최씨(全州崔氏入鄕祖:문성공계안렴사공파10世참봉공[諱譚])가 입촌하여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어 전주최씨가 대성을 이루어 살고 있고 그 외 성씨로 함안이씨(李氏), 진양하씨(河氏)등 제 성씨가 마을을 형성하여 살고 있다.

◎ 마을의 지세(地勢)
당산마을은 연화봉(蓮華峰)이 동남으로 뻗어 내려 용암산(龍岩山)과 작약산(芍藥山)을 이루고, 옥녀봉(玉女峰)의 주맥이 흘러내린 산 자락에 자리잡은 아담한 마을로 당산 주변에 형성된 농경지는 경지정리가 된 비옥한 토질이나 수원이 부족한 지대이다.

◎ 주민(住民)
마을 주민은 56가구에 108명(남자:48명, 여자:60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거주민의 성씨는 전주최씨(崔氏), 함안이씨(李氏), 성산이씨(李氏), 진양하씨(河氏), 김녕김씨(金氏)등 제씨가 살고 있다.

◎ 주민의 생업(生業)
주민의 생업은 미·맥위주의 농업을 주업으로 하고 일부 축산(한우 호당2~3두 사육과 양돈등)을 하는 농가도 있으며 최근에는 마을내에 오징어 건조장이 마련되어 주민이 농한기에 노임소득을 올리고 있어 도움이 되고 있다.

◎ 주거환경(住居環境)
마을의 초가 지붕은 1970년대에 스레트와 가와로 전면 지붕 개량을 하였으며 지금은 현대식 주택을 건축하는 가구도 있고, 또 주택구조도 현대식으로 개량을 추진하고 있다. 그리고 문화시설인 전기, 전화, TV등 문화시설은 전 가구에 보급이 이루어지고 있다.

◎ 당산쌍정(堂山雙亭)
구만면 화림리의 당산(堂山)마을엔 전주최씨 세장비와 문중의 옥산재, 낙산재, 농산재(籠山齋)와 영모재(永慕齋), 옥봉재(玉峯齋)가 있고 첨모대가 마을에 있다.

 

 

 

 

 

 

 

 

 

 

 

 

 

 

 

 

 

 

 

 

玉山齋 史蹟碑(옥산재 사적비)


이 곳은 우리 全州崔氏(전주최씨) 始祖(시조) 文成公(문성공)(諱 阿(휘 아))의 長子(장자)이신 高麗(고려) 慶尙道 按廉使府君(경상도 안렴사부군)諱 龍生(휘 용생))을 모신 墓壇(묘단)이다. 詳考(상고) 하건대 府君(부군)은 文科(문과)에 及第(급제)하여 持平(지평)을 거쳐 臺諫(대간)에 奉職(봉직)하실 때 우리 朝廷(조정)에 配屬(배속)된 元(원)나라 宦官(환관)의 內政干涉(내정간섭)과 橫暴(횡포)가 甚(심)하여 王權(왕권)이 無力(무력)해지자 그 弊害(폐해)와 不當性(부당성)을 屢次(누차) 王(왕)에게 直諫(직간)하다가 오히려 그들의 嫉害(질해)를 입고 忠定王(충정왕) 二年(이년)西紀 千三百五十年(서기 천삼백오십년))에 外職(외직)인 慶尙道按廉使(경상도안렴사)가 되어 赴任(부임)하셨는데 當時(당시) 東京(동경)(慶州)에 派遣(파견)된 元(원)나라의 軍事(군사) 監督官(감독관)이 苛斂誅求(가렴주구)만 일삼는 등 그 橫暴(횡포)가 極(극)에 달하고 있는데도 누구 하나 이를 制御(제어)할 수 없음을 보시고 府君(부군)께서는 그 淸廉(청렴) 剛直(강직)한 性稟(성품)으로 이들을 모조리 封庫罷職(봉고파직) 시키고 그 罪狀(죄상)을 낱낱이 榜(방)을 붙혀서 백성들에게 알렸다. 이 일로 인해 讒訴(참소) 당하여 削奪官職(삭탈관직)된 후 泗川(사천) 豊井洞(풍정동)에 流配(유배) 되셨는데 이에 굽히지  않고 繼續(계속)하여 李衍宗(이연종), 崔瑩將軍(최영장군) 등과 意氣投合(의기투합)하여 外勢(외세)를 몰아내고 나라를 바로 세우고자 努力(노력)하시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世上(세상)을 떠나셨다. 高麗史(고려사)는 이 萬古(만고)의 忠節(충절)을 燦然(찬연)한 歷史(역사)의 한 章(장)으로 特筆(특필)하여 오늘에 傳(전)하고 있으니 우리 後孫(후손)들에겐 至上(지상)의 悲憤(비분)인 同時(동시)에   榮光(영광)이오 矜持(긍지)가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이 府君(부군)께서 泗川(사천)에 流配(유배)되어 살게됨으로써 嶺南(영남)에 全州崔氏(전주최씨)가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 後(후) 朝鮮朝(조선조)에 이르러 府君(부군)의 玄孫(현손)   縣監公(현감공)(諱 子涇(휘 자경))이 처음으로 벼슬길에 나가서 晉州(진주)로   移徙(이사) 하였고 그 長孫(장손) 郡守公(군수공)(諱 以湜(휘 이식))은 晉州(진주)에서 咸安(함안)으로 옮겼으며 다시 그 長孫(장손) 右尹公(우윤공)(諱 潭(휘 담))은 咸安(함안)에서 九萬(九巒)(구만(구만))으로 入固城(입고성) 하니 以後(이후)로 子孫(자손)이 크게 蕃盛(번성)하여 우리나라 屈指(굴지)의 門閥(문벌)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러나 오랜 歲月(세월)이 흐르는 동안 여러번의 兵燹(병선)을 겪으면서 府君(부군)을 爲始(위시)하여 累代(누대)에 걸친 先祖(선조)의 墓(묘)를 失傳(실전)한 不敬(불경)을 저지르게 되었는데 西紀(서기) 千九百二十四年(천구백이십사년) 甲子(갑자)에 비로소 泗川(사천) 豊井洞(풍정동)에 터를 잡아 府君(부군)의 墓壇碑(묘단비)를 세우고 齋室(재실)을 지어 玉山齋(옥산재)라 이름하고 해마다 祭祀(제사)를 모셔왔다. 그러던 중 지난 西紀(서기) 二千年(이천년) 庚辰(경진)의 大宗會(대종회)에서 戊寅(무인) 譜事(보사)로 마련된 基金(기금)에 子孫(자손)들의 誠金(성금)을 보태어 府君(부군)의 偉業(위업)에 걸맞은 玉山齋(옥산재)를 移轉(이전) 新築(신축)하기로 宗論(종론)을 모아 玉山齋 新築 推進委員會(옥산재신축추진위원회)를 構成(구성)하고 敷地(부지)를 物色(물색)하던 중 右尹公(우윤공)께서 肇基(조기)하신 世庄(세장)이자 子孫(자손)들의 集成村(집성촌)인 이곳으로 옮기는 大役事(대역사)를 이룩하기에 이른 것이다. 처음에는 齋室(재실)과 함께 壇碑(단비)도 새로 세울 計劃(계획)이었으나 祖上(조상)을 위한 先代(선대)의 精誠(정성)을 保存(보존)해야 한다는 宗意(종의)에 따라 本體(본체)인 碑身(비신)은 그대로 옮겨 모시고 받침돌만 바꿔 세웠기에 外觀上(외관상) 모습은 洽足(흡족)하지 못하나 祖上(조상)의 얼이 깃든 由緖(유서) 깊은 明堂(명당)을 卜定(복정)하여 이룩한 神聖(신성)한 墓壇(묘단)이고 齋室(재실)이라 하겠다.

府君(부군) 外(외)의 失墓(실묘)한 八位(팔위)의 先代(선대)에 대하여는 西紀(서기) 千九百四十七年(천구백사십칠년) 丁亥(정해) 道山書院(도산서원) 境內(경내)에 壇碑(단비)를 세우고 祭祀(제사)를 모셔왔는데 이번에 玉山齋(옥산재)로 옮겨 府君(부군)의 膝下(슬하)에 드시게 하여 昭穆(소목)을 밝혔으니 이 또한 뜻깊은 일이라 하겠다. 다만 처음에 計劃(계획)했던 東西齋(동서재) 建立(건립)을 함께 이루지 못하고 後代(후대)의 課題(과제)로 넘기게 된 아쉬움이 크다. 우리가   渴望(갈망)해 오던 府君(부군)의 靈魂(영혼)이 臨(임)하실 齋堂(재당)이 그 크신 偉業(위업)과 蔭德(음덕)에 比(비)하면 未洽(미흡)하여 부끄럽지만 그대로 우리 子孫(자손)들의 精誠(정성)을 모아 이토록 敬虔(경건)히 모셨으니 우리 後孫(후손)들은 옷깃을 여미고 府君(부군)의 氣魄(기백)과 靈氣(영기)와 義憤(의분)을  오늘에 되새겨 崇祖睦宗(숭조목종) 孝友(효우)의 精神(정신)이 永遠(영원)토록  이곳에 油然(유연)하기를 바라노라. 


西紀 二千六年 丙戌  三月     日

玉山齋新築推進委員會

委員長 後孫 洛瑞 謹識

 

 

 

 

 

 

 

 

 

 

 

 

 

 

 

 

 

 

 

 

 

 

 

 

 

 

 

당산마을로 들어가는 초입에 전주최씨세장비가 세워져있고,

이 곳 당산을 올라서 넘으면 고성입향조이신 10세 참봉공(諱潭)의 유택이 모셔져 있다.  

 전주최씨세장비

 

 

 

 

 

 

 

 

 

전주최씨세장비쪽에서 바라본 옥산재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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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최씨세장비쪽에서 바라본 옥산재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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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입향조이신 10세 참봉공(諱潭)묘비명 

 고성입향조이신 10세 참봉공(諱潭)묘비명

 고성입향조이신 10세 참봉공(諱潭) 유택

고성입향조이신 10세 참봉공(諱潭) 유택 

 고성입향조이신 10세 참봉공(諱潭) 유택

 고성입향조이신 10세 참봉공(諱潭) 유택에서 내려다 본 구만면 들녘

고성입향조이신 10세 참봉공(諱潭) 유택에서 내려다 본 구만면 들녘 

고성입향조이신 10세 참봉공(諱潭) 유택에서 내려다 본 옥산재 전경 

고성입향조이신 10세 참봉공(諱潭) 유택에서 내려다 본 옥산재 전경  

 고성입향조이신 10세 참봉공(諱潭) 유택에서 내려다 본 옥산재 전경 

당산마을 제일 높은 위치에 있는 옥봉재각현판 

당산마을 제일 높은 위치에 있는 옥봉재각  

당산마을 제일 높은 위치에 있는 옥봉재각  

=玉峯齋에서 건너다본 固城入鄕祖 10世 參奉公(諱潭)의 遺宅이 모셔져 있는 당산 전경=

가져온 곳 : 
카페 >전주최씨 문성공자손 [全州崔氏 文成公子孫]

 

가져온 곳 : 
카페 >전주최씨 문성공자손 [全州崔氏 文成公子孫]
글쓴이 : 晛溪 趙炳龍| 원글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