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개 내 (Gaenea)
문화예술,자연,생태 ,역사,기타

[스크랩] 가야 시조 탄생설화

by joolychoi 2007. 2. 1.
김해 가락국의 시조인 수로왕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나라를 세웠다는 건국 신화


가락국의 수로왕 탄강 설화에 대해서 자세히 전하고 있는 것은 『삼국유사』 가락국기(駕洛國記)입니다. 그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천지가 개벽한 후에 이 땅에는 나라의 이름이 없었고, 또한 임금과 신하라는 칭호도 없었다. 옛날에 구간(九干)이 있어 이들이 백성을 다스렸으니 1백호에 7만 5천인이었다. 때마침 후한(後漢) 세조(世祖)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18년 임인(壬寅) 3월 계욕일에 구지봉(龜旨峰)에 이상한 소리로 부르는 기척이 있어 구간 등 수백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러자 하늘에서,
“하늘이 내게 명하여 이곳에 나라를 세우고 임금이 되라 하시므로 여기에 왔으니 너희는 이 봉우리의 흙을 파면서 노래하고 춤추어라.”
라는 말이 들려왔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내놓지 않으면 구워먹으리라.”
구간 등이 구지가(龜旨歌)를 부르고 춤추었다. 그러자 곧 하늘에서 자색(紫色) 줄이 드리워 땅에 닿았는데, 줄 끝에는 붉은 폭(幅)에 금합(金合)이 싸여 있어 열어 보니 해와 같이 둥근 황금 알 여섯 개가 있었다.

다음날 새벽에 알 6개가 화하여 사내아이로 되었는데 용모가 매우 깨끗하였다. 이내 평상 위에 앉히고 여러 사람이 축하하는 절을 하고 공경을 다하였다. 그 달 보름에 모두 왕위에 올랐다. 처음으로 나타났다고 하여 휘(諱)를 수로(首露)라 하고 혹은 수릉(首陵)이라 하였는데, 수로는 대가락(大駕洛)의 왕이 되고 나머지 5인도 각기 5가야의 임금이 되었다.

수로왕의 탄강 설화는 김해 가락국의 건국신화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설화는 전승과정에서 많은 윤색이 이루어지는데, 당대인의 역사 인식에 따라 가공의 사실이 첨가되기도 합니다. 서기 42년에 가락국이 건국되었다거나 또는 수로왕이 158년간 나라를 다스렸다고 하는 것을 그 시대의 역사 사실로 볼 수는 없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수로왕 탄강 설화는 연구 분야에 따라서 천손강림 설화, 농경 사회의 전통 내지는 민속의례, 즉위의례 등 다양한 측면에서 논의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그 이면에 있는 고대인들의 사상과 역사적 배경 등 보다 종합적인 검토가 필요합니다.

이 내용 가운데 수로설화의 성격을 가장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은 ‘붉은 폭(幅)’에 싸인 금합 속의 알이 하늘에서 산봉우리로 내려왔다’ 라고 하는 천손강림과 난생설화의 요소입니다.

우리 나라의 건국 신화에는 단군 신화 이래 대부분 천손강림(天孫降臨)사상이 들어 있습니다. 수로왕 설화 역시 높은 산봉우리인 구지봉에서 내려오는 등 전형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배자는 이러한 관념을 내세워 현실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권력행사를 정당화하고, 일반민들로 하여금 그 지배를 신성하게 받아들이게 하였습니다.
또한 새(鳥)로 변신하는 능력이라든지 허왕후와의 결혼담은 지배자로서의 위용과 건국시조로서의 정당성을 담보하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온다는 천강신화는 새로운 이주민 집단이 도래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수로왕은 단순히 한 개인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선진문물을 가지고 김해지역 또는 가야지역으로 이주한 선진집단인 것입니다. 물론 그 이전에 이미 김해지역에는 토착집단이 있었는데, 9간이 이들 집단을 각각 대표하였습니다. 이들 토착집단과 수로집단이 결합하여 성립된 것이 가락국이었을 것입니다.

9간 세력은 청동기문화를 기반으로 하였을 것이고, 새로 도래해온 수로왕집단은 선진적인 철기문화를 가진 집단이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서기 42년이라는 가락국의 성립연대는 역사사실의 일반적인 측면에서나 고고학적 자료의 검토를 통해 볼 때는 타당하지 않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알에서 수로왕이 태어났다는 사실은 동아시아에 널리 퍼져 있는 난생(卵生)설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알이 황금색이며 해처럼 둥글었다는 기록은 태양숭배사상의 흔적을 보이는 것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수로왕이 천손이라는 관념은 선택된 사람이라는 후대 사람들의 생각이 투영된 결과로서, 자신은 하늘의 자손이라는 관념을 피지배층에게 내세워 현실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권력행사를 정당화,합법화,신성화하였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수로왕 외에 5명의 왕이 난생하여 6가야를 이루었다고 하는 ‘6란설’은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에 의하면 가야의 전신인 변한에는 12개의 국이 있었던 것은 물론이고, 가야지역에 선진철기문화를 소유한 집단이 나타날 무렵의 고고학적 현상 역시 『삼국유사』 '오가야 조' 에 보이는 가락국을 제외한 5개의 나라에 비정되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6란설’은 후대의 ‘가야연맹체’ 관념에 의해 윤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수로왕 탄강 설화에서는 이외에도 해양문화적인 요소도 담겨 있습니다.
천강설화의 요소인 하늘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 민족에게는 일반적으로 북방을 의미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영적 바다동물인 거북(龜) 역시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삼국유사』'어산불영 (魚山佛影)' 에는 ‘만어사(萬魚寺)는 옛날 아야사산(阿耶斯山)이다. 산 옆에 가라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옛날 하늘에서 알이 해변으로 내려와 사람이 되어 나라를 다스렸으니 그가 수로왕이었다’ 라고 하였는데, 이 기록에서도 역시 가락국과 해양과의 관련성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즉, 가락국이 가지고 있는 지리적인 입지조건과 또 철을 매개로 한 해상교역세력으로서 성격을 볼 때, 거북으로 표현되는 해양문화 역시 수로왕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살펴 볼 것은 수로왕의 성인 김씨와 관련된 것입니다. 현재 한국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자랑하는 큰 성씨(姓氏)가 김해 김씨(金海 金氏)입니다. 그 유래를 알아 볼 수 있는 『삼국유사』 가락국기와 왕력(王曆)의 내용은 각각 다음과 같습니다.

거등왕(居登王)은 아버지가 수로왕이고 어머니는 허왕후이다. 개황력(開皇曆)에는 성이 김씨이니 대개 나라의 세조가 금란(金卵)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수로왕은 임인 3월에 알에서 태어나 이 달에 즉위하여 158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금란에서 났으므로 성을 김씨라 하니 개황력에 실려있다.

이 두 글에서는 수로가 금알에서 났기 때문에 김씨가 되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는 이와는 사뭇 다른 내용이 보입니다.

신라 사람들이 스스로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의 후손이라고 하여 金으로 성을 삼았고 유신의 비문에도 헌원(軒轅)의 후예요 소호(少昊)의 직계라고 하였으니 남가야(南加耶)의 시조 수로는 신라와 동일한 성씨이다.

중국의 ‘소호금천씨설’을 채용하여 신성성과 유구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개황력은 가야 멸망 이후 편찬된 것이고, 『김유신비문』 역시 7세기 후반에 건립된 것으로 보아 두 가지 기원설 모두 가야 당대에 이루어진 것은 아닌 듯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7세기 중반 이전에는 신라왕족과 마찬가지로 김씨성(金氏姓)이 칭해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백승충>

 
수로왕비가 인도 아유타국에서 와서 김해 가락국 시조인 수로왕과 결혼하는 설화를 소개하고, 그와 관련된 여러 학설들을 설명함

수로왕비의 가야 도래와 혼인담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에 그 과정이 상세히 그려져 있습니다. 기록을 검토해 보면 지명과 신화, 전설, 민속학적 풍습 등 다양한 내용들이 숨어 있어, 고대 가야 건국 당시의 모습을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수로왕비와 김수로왕의 결혼과정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 가락국기와 금관성 파사석탑 조에서 더듬어 볼 수 있습니다.

건무(建武) 24년 (기원 48년) 무신(戊申) 7월 27일에 구간 등은 수로왕에게 왕비를 얻을 것을 청하는 말을 올렸다. 그러자 왕은 “내가 이 곳에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이었다. 나의 배필도 역시 하늘이 명할 것이니 염려 말라.” 라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유천간(留天干)에게 빠른 배와 말을 주어서 망산도(望山島)로 가서 기다리게 하고, 또 신귀간(神鬼干)에게 명령하여 승점(乘岾)으로 가게 했다.
그때 갑자기 한 척의 배가 바다의 서남쪽으로부터 붉은 돛을 달고 붉은 기를 휘날리면서 북쪽으로 향해 오고 있었다.
유천간 등이 먼저 망산도에 위에서 횃불을 올리니 배 안의 사람들이 앞다투어 육지로 내려왔다.

승점에 있던 신귀간이 이를 바라보고는 대궐로 달려가서 왕에게 알리니 왕은 매우 기뻐했다. 왕은 구간을 보내어 그들을 맞이하여 대궐로 모시게 했다. 그러나 배 안의 왕비는 “나는 너희들을 모르기 때문에 경솔히 따라 갈 수 없다.” 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왕은 행차하여 대궐 아래로부터 서남쪽으로 60보쯤 되는 곳에 가서, 장막을 설치하고 기다렸다. 왕비도 별포(別浦) 나룻터에 배를 대고 육지로 올라왔다. 그리고 자기가 입고 있던 비단바지를 벗어서 산신에게 바쳤다.

왕비는 여러 사람들과 보화를 가지고 행궁으로 다가가니 왕은 그녀를 맞이하여 장막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가야에 오게 된 연유를 수로왕에게 이야기했다. “저는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인 허황옥(許黃玉)이라고 합니다.

본국에 있을 때 부모님들께서 꿈에서 상제님을 보았는데 상제께서 ‘가라국왕 수로는 하늘에서 내려보내 왕위에 오르게 했으나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공주를 보내라’ 라고 하셔서 저를 가락국으로 떠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배를 따고 떠났는데 수신의 노함으로 갈 수 없게 되어 다시 돌아가 석탑을 배에 싣고 무사히 여기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왕과 왕비는 두 밤 한나절을 지낸 후 타고 왔던 배를 돌려보내고 대궐로 돌아왔다.
이후 수로왕비는 기원 189년 1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구지봉 동북쪽 언덕에 묻힐 때까지 왕의 곁에서 내조를 다했다.
백성들은 왕비를 잊지 못하여 왕비가 처음 배에서 내린 나룻가의 마을을 주포촌(主浦村)이라 하고, 비단 바지를 벗었던 산등성이를 능현(陵峴), 붉은 깃발이 들어왔던 해변을 기출변(旗出邊)이라고 했다.
또 가락국의 질지왕은 452년 왕과 왕비가 혼례를 치른 곳에 왕후사(王后寺)를 세워 명복을 빌었다.

고려시대에도 매년 7월29일에 이 지방의 사람들은 승점에 올라가서 장막을 설치하고 술과 음식으로써 즐기고 떠들면서 동서로 눈짓을 보내 건장한 인부들을 좌우로 나누었다. 그리고 망산도로부터 말은 육지로 달리고 배는 북으로 옛 포구를 향해 달리게 했다. 이것은 수로왕비가 도착한 것을 왕에게 급히 알리려 했던 유천간과 귀천간의 일을 기리기 위해서였다.

삼국유사』의 수로왕비 관련 기록은 설화적 요소가 내포되어 있는 것은 물론이고 후대의 불교적 윤색도 가해져 있기 때문에 해석상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기본적인 관념을 전제로 하고 이 이야기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설화에 나타나는 수로왕비의 출신지인 아유타국은 과연 어디였을까, 그리고 신행길에 거쳐간 곳으로 기록된 곳들이 현재의 어떤 곳들이었을까 하는 것은 수로왕비의 결혼 과정과 관련된 중요한 문제들입니다.

수로왕비의 출신지가 어디였는가에 대해서는 아주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어왔습니다. 불교 동점(東漸)의 신앙과 결부된 표현일 뿐이라는 설, 일본에 있던 가락국의 분국이었던 아유타국이었다는 설, 기원전 1세기 인도에 있었던 아요디아 왕국이 건설한 식민국인 타이의 아유티야 또는 아요디아에서 중국 사천성 보주(普州) 지역으로 집단 이주해 살던 허씨족이 이주해 온 것이라는 설, 낙랑지역에서 도래한 유이민 혹은 상인이었다는 설 등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이 혼인담에는 수로왕비 설화가 이야기로 꾸며질 때 또는 『삼국유사』가 쓰여질 당시 사회의 사상적 흐름이 이 설화에 첨가되었을 가능성이 아주 많습니다. 정확한 출신지에 대해서 확인할 방법은 없습니다만, 수로왕비의 도래와 혼인관계설화는 선진문물을 가지고 수로왕세력과 제휴한 새로운 세력과 관련된 이야기라는 인식은 할 수 있습니다.
김해지역에는 아직까지도 수로왕비가 가락국에 도착해서 수로왕과 혼인하기 위해 거쳐갔던 곳을 중심으로 전설과 얽힌 유적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망산도, 승점, 주포, 능현, 왕비사터 등이 그 곳입니다. 그러나 『삼국유사』에 나타나는 수로왕비의 도래 시기인 기원 1세기대는 물론이고 『삼국유사』가 쓰여질 당시인 고려시대의 지형은 지금과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지질학적 연구에 의하면 지금의 김해시 중심부 남쪽은 예전에는 바다였습니다. 삼각주가 형성되고 평야지대로 변한 것은 근래의 상황입니다. 조선시대의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을 참고해 보더라도 지금과는 많이 다릅니다.
따라서 설화 속의 수로왕비의 초행길을 훑어보는 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만, 지금까지의 연구를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망산도는 유천간이 배를 기다린 곳인데, 주석에서는 수도의 남쪽에 있는 섬이라고 합니다. 일찍이 조선시대의 김정호(金正浩)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전산도(前山島)를 망산도로 추정했는데, 이곳은 현재 칠산(七山)이 위치한 곳입니다. 당시 이 일대가 김해의 내해(內海)였었다는 지리적 상황으로 보아서 타당한 위치입니다.

그런데 진해시 용원동에는 현재 망산도로 불리는 돌섬이 있고 또 인근에는 유주비각(維舟碑閣)이 세워져 있어 이 곳을 망산도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후대에 불리워진 듯합니다.
승점은 망산도와 수로왕비의 배를 높은 곳에서 볼 수 있던 곳으로 수로왕의 명령으로 이곳에 온 신귀간은 수로왕비의 출현을 수로왕에게 알립니다. 승점은 ‘연하(輦下)의 나라’ 라는 주석을 달고 있는데, 이것에 대해서는 ‘서울 아래턱의 땅’, ‘기내(畿內) 또는 기내의 나라’ 라는 다양한 해석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또 승점의 ‘점(岾)’이 고개를 뜻하므로 임금이 타는 수레가 닿을 만한 거리에 있는 곳이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승점은 분산성 남쪽의 남산공원 일대 혹은 봉황대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주포는 수로왕비가 내리던 곳으로 ‘산외별포진두(山外別浦津頭)’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수로왕이 서남쪽에 장막을 치고 있을 무렵에 내린 곳입니다. 주포는 입지조건으로 볼 때 망산도의 가시거리 내에 있어야 하고, 배가 정박하기 쉬운 곳이어야 합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김해부와 진해의 경계지점에 주포가 있었다고 하고 현 지명에도 진해시 가주동 북쪽에 주포라는 곳이 있으나 이 지역으로 비정하기에는 많은 무리가 따릅니다. 주포는 가락국의 주요 항구였을 것인데, 현 김해시 생곡의 장락, 또는 현 부산광역시 강서구 미음동에 비정하는 것이 타당할 듯 합니다.

능현은 수로왕비가 상륙하여 높은 언덕에서 쉬면서 입고 온 비단바지를 산령에게 바쳤던 곳입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부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라고 하였고, 『여지도서(輿地圖書)』를 보면 명월산 줄기 오른쪽에 표시되어 있읍니다. 『명월사사적비문』에 의하면 능현이 명월사 동남쪽에 위치한다고 전하고 있어서 이와 일치합니다. 『대동여지도』에는 명지도 맞은편의 강변 가까운 곳에 명월사가 표기되어 있습니다.

왕비사는 수로왕과 혼례를 치렀던 장소인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부의 남쪽 40리 장유산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조선시대 정조대에 편찬된 『김해부읍지(金海府邑誌』에는 장유면 응달리 태정마을 뒷산의 임강사(臨江寺) 혹은 태장사(苔長寺)라는 사찰이 왕비사의 후신이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다만『명월사사적비문』에는 합혼처가 명월산 일대인 것으로 기록하고 있기도 합니다.

수로왕비가 수로왕과의 혼인을 위하여 인도에서 왔다는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기는 힘듭니다. 수로왕비 역시 탈해나 수로왕과 마찬가지로 다른 곳에서 이주해온 세력으로 보아야할 것입니다. 술법 시합에 져서 쫓겨난 탈해와 달리 수로왕비는 수로왕에 의해서 받아들여집니다. 아마도 이 두 세력이 결합하는 과정들이 결혼설화로 재구성되지 않았는가 합니다.


출처 : 한민족참역사
글쓴이 : 연장군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