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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여행 및 문화

[스크랩] ‘묘족’과 우리민족은 ‘형제국’이다!

by joolychoi 2007. 1. 5.

‘묘족’과 우리민족은 ‘형제국’이다!





(중국사서의 기록에 나오는 ‘치우천자와 묘족’)


(1) 사기

- 리동이국명야(黎東夷國名也)
- 구리군호치우시야(九黎君號蚩尤是也)
- 치우고천자(蚩尤古天子)
- 삼묘재강회형주(三苗在江淮荊州)

(2) 예기

- 묘구리지후(苗九黎之後)
- 구리위묘민선조(九黎爲苗民先祖)

위 사서들의 내용은

구리의 통치자는 ‘치우천자’이고
구리의 후예가 "묘민"이고
구리는 "묘민"의 선조라 하였습니다

즉, 동이/구리국의 백성이 "묘민"이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풀어서 설명하면

기원전 2700년대에

중국의 시조라 하는 황제헌원은
한웅시대(구리,배달,신시시대)의 제후였던 소전의 아들(자손)로

산동성 ‘수구’에서 태어나 치우천자에게 반기를 들어 ‘쿠테타’를 꿈꾸었으나

치우천자에게 쫒겨
70여회의 전쟁에서 패하고

‘탁록’에서 사로잡혀 신하의 맹세를 하고
저 황토고원 ‘장안유역’으로 유배되어
자신이 태어난 고향인 동이의 옥토 산동성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장안북쪽 ‘황릉’에서 죽어 ‘서토(중토, 한족)의 시조가 되었다

이때 (기원전 2700년대)
구리국(배달, 한웅시대, 신시시대) 치우천자의 백성이 ‘묘민’이었으니
‘묘족(=삼묘)’는 강회형주 유역에 살았다

① 강 = 현재의 ‘양자강’
② 회 = 산동성 아래 ‘회수’
③ 형주 = 하남성 ‘형주’ = 신라태자묘가 발굴된 곳

즉, 치우천자의 백성 ‘묘민’은 이 세지역을 주요 무대로 살았다는 것이다.

치우천자의 무덤이
중국 최고의 정사인 사마천 ‘사기본기’에 기록된 대로
산동성 동평에서 발굴 되었으니(치우총, 치우사 명문의 비석)
‘삼묘족’이 치우천자의 백성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를 증명하듯이
‘호남성 묘족자치치구 회원현’에서는
‘치우천자 동상 제막식’을 거행하고
사서에 기록된 대로 매월 10월달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양자강 이남 고산지대에 주로 거주하는 묘족들...
한족에 밀리어 중국남부로 서쪽으로 이동을 한 것이다

치우천자의 백성이 묘족이니
언젠가는 시조묘가 있는 ‘산동성 동평’으로 찾아가야하는 것 아닌가 ?

그곳이 바로 동이의 강역중 중심강역이었던 것이다
역사적 연원으로 보면 ‘묘족은 형제국’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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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악마와 묘족(苗族)의 "치우천왕"에 대한 인식

(글쓴이 : ))

안녕하십니까?

지난 6월 9일
전 지구촌이 월드컵 개막과 함께 축구에 열광을 하기 시작하였으며

우리는 2002년 4강신화 재현이라는 국민적 열망과 함께
12번째 태극전사라는 붉은악마 응원단은 대 토고전에 대한 승리를 염원하고 있을 당시
6월 10일 중원 대륙의 남단의 운남성(雲南省)에서는
묘족들에 의해 그 들의 전통축제인 화산절(花山節)이 열렸습니다.







위 그림에서 보듯이
맨 위의 치우천왕을 상징하는 문양이 선명하게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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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고대 청동유물에는 어김없이 이문양이 등장한다
주인공은 당연히 치우천자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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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족을 말할 때
치우천왕을 빼고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로
묘족들은 그들의 시조 치우천왕을 매우 자랑스러운 민족의 영웅으로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치우에 대한 사랑과 긍지는 그 들의 문화 곳곳에 나타납니다.
묘족의 전통 복식과 전통예술 곳곳에서도 치우천왕의 흔적이 역력합니다.





위 그림에서 알 수 있듯이
소뿔(牛角) 모양의 투구를 형상시킨 장식이 많이 있습니다.
소뿔(牛角)은 바로 치우천왕과 너무나 관련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소뿔(牛角)투구 하면 치우천왕, 치우천왕하면 쇠뿔(牛角)투구를 떠올릴 정도니까요.

우리는 "붉은악마"가 바로 치우천왕을 형상화시킨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번 월드컵부터 등장한 치우천왕의 소뿔(牛角)투구가 과연 우연일까요?





이번 월드컵 응원때
저 소뿔테가 없어서 못 팔 정도라고 했었죠.

그런데,
그 소뿔테를 착용한 사람에게
정작 그 소뿔테의 연원이나 착용하는 이유에 대하여 물어보면
머뭇거리며모른다고 답을 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나,
묘족들은 누구나
자기들은 중원평원을 통치한 치우천왕의 후손이며
모든 역사와 문화의 연원이 치우천왕으로부터 비롯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묘족들은
단풍나무(楓木)가 치우천왕이 변화하여 된 형상으로 믿기때문에
단풍나무를 좋아하며 정열적인 붉은 색을 좋아합니다.
마치 우리가 붉은악마의 그 정열을 좋아하는 것처럼 말이죠.

묘족들의 전통예술 가운데 하나인 "전지(剪紙)"라는 것이 있는데,

이 전지는
종이를 가위로 자르고 오려서 만든 예술품인데
대부분 이 전지작품 역시 붉은색입니다.

아래의 그림은 전지작품인데
이게 한 장의 종이를 가지고 이렇게 만든 것입니다.
대단합니다.



묘족들이 치우천왕을 기리며 만든 노래 중에
<치우만가 蚩尤挽歌>라는게 있는데
그들의 치우천왕에 대한 역사관과 민족관이 잘 나타나 있는 것 같아 소개합니다.

《蚩尤挽歌(치우만가)》

千古奇才?空?, (천고기재횡공현)
可堪??炎??。 (가담병론염황간)
五兵刑法君始点    (오병형법군시점)
九黎生??云天。 (구리생기충운천)
席卷中原?夏?, (석권중원화하련)
血染江河五千年。 (혈염강하오천년)
英名不因?鹿?, (영명불인탁록패)
老黑石山百花?。 (로흑석산백화선)

내용을 해석하자면

천고(千古)의 세월 동안 이어져오는 뛰어난 영웅인 치우천왕은
염제(炎帝)와 황제(黃帝)와 더불어 가히 더불어 이야기할 만하다.

다섯 가지의 병기(兵器)를 만들었으며 형(刑)과 법(法)이 치우천왕으로부터 비롯되었으며
구리(九黎) 백성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고도 남는다.

화하족(華夏族)의 연맹세력인 염제와 황제를 무찌르고 중원대륙을 석권하니
5천년 동안 강물을 피로 붉게 물들게 하였다.

빛나는 영웅의 이름이 탁록(?鹿)의 패배에 의한 것이 아니지만
흑석산의 온갖 꽃들이 여전히 선명하다.

대체로 묘족들의 치우천왕에 대한 역사인식에는
"황제가 치우를 잡아 죽였다."라는 사기의 내용을 믿는 듯 합니다.

물론 여기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묘족의 사학자들이 다수 있지만,
묘족들은 치우천왕이 황제헌원에게 잡혀 죽임을 당하고
중원의 땅에서 쫒겨나 지금의 남부지역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는
우리의 역사서인 <규원사화>나 <한단고기>에서 언급되는
치우천왕의 부장인 치우비가 급히 공을 세우려다가 진중에서 죽은 것을
화하족의 사가들이 치우천왕을 잡아 죽였다라고 기술하고 있는 것 뿐이라고
쓰여있는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이는 역사적으로 너무 많은 탄압과 억압을 당하여 왔기때문에
일부 공존의 형식으로 화합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표면적으로
현재 중원 땅의 모든 소수민족이 그렇듯이

"중국"이라는 국호를 사용하고
"중화민족"이라는 족명에 녹아 있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그들의 생존전략에 맞아 떨어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중화민족"은 "염황치"의 자손이다>라고 하는 것에 묵인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5천여년 이상을 자기의 뿌리를 잊지 않고
지금도 치우천왕에게 제사를 지내는 민족은 아마도 묘족밖에 없을 겁니다.

그들이 말하고 있지 않는 깊은 곳 속에는
치우천왕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하는 마음들이 있을 겁니다.

묘족들은 과거 숱한 탄압을 받아 해외로 많이 진출해 있다 합니다.

나중에 시간이 되면 소개를 하겠지만 <五千年蚩尤祭 5천년치우제>라는 글을 보면
이러한 내용들이 속속들이 녹아 있습니다.

묘족과 우리는 치우천왕이라는 공통 뿌리가 있기 때문에
앞으로의 교류는 더욱 확대되리라 생각합니다.

묘족에게
우리의 붉은악마가 치우천왕을 나타낸다는 것을 알려준다면
그들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합니다.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이기 때문에
묘족과 우리가 하나가 되지 말란 법이 없습니다.

남으로는 "묘족", 북으로는 "몽골족" 이렇게 협력을 하면
좋은 파트너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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