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개 내 (Gaenea)
문화예술,자연,생태 ,역사,기타

민족의 아픈역사 6,25 전쟁

by joolychoi 2016. 7. 8.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민족의 아픈역사 6,25 전쟁
 
 
 

 

 

 

♣ 민족의 아픈역사 6.25전쟁이 일어난 이유 ♣

 

오늘은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66주년 되는 날 입니다.
많은 선,후배 전우들이 나라와 국민들 위해 꽃다운 홍안의 젊을 활짝 피어 보지도 못한채 희생으로

오늘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날입니다.
하지만 6.25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해 역사적 배경과 시기를 잘 모르시는 분들이 많으십니다.

 

6.25전쟁이 일어난 이유!
6.25 전쟁은 1950년 6월 25일 부터 1953년 7월 27일 현 주지양선에서 휴전되기 까지 3년 1개월간 지속된

한국전쟁으로,일제 해방 후 5년 만에 일어났으며 민족의 분열과 대립의 심화, 분단체제를 확립시킨

결정적인 계기가 된 사건입니다.근원적인 6.25전쟁은 일제 36년간 압박과 서러움의 후유증이라

칭해도 과언은 절대로 아니다.일제에서 해방된 후 이승만 정권은 초기부터 좌익과

 우익세력의 반대로 불안한 정세가 지속되었다.


미 국정이 유지시킨 친일세력을 그대로 수용했기 때문에 민족 국가로서의 명분이 부족했고, 친일파 처단을

위한 반민족 행위 특별조사위를 이승만 정권이 탄압을 할수밖에 없었다.

또한 박헌영 성시백 등 공산사상으로 서울한복판에서 이승만 정권에 대한 모략선동으로 국민들과 군부의

 반란과 민중들의 저항이 한층 치열했으며,반란군들이 산악지대로 들어가 유격대가 되어 유격전을

 펼치는 등 극심한 정치적 상황, 경제적 불안의 형국을틈타 북괴 김일성은 통치체제를 빠르게

안정시키고, 남한 해방의 필요성을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급기야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경 38선 여러지역에서 북한의 공세로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본 老兵은 당시 38˚선 이남 경기도 甕津(옹진)태생으로 강령 農業(농업)중학교 제3학년 생으로 38선 국경

까치산(쇠치고개)로 탄피수집차 방문 17연대 군인들과 만나보니 우리학생들에게 제식훈련과 실탄사격

훈련을 연마시켜주신 교관님을만나 반갑게 인사드리고 방문 목적을 말씀 드리든중 학생들 오늘 토요일

 외출 외박 나간 군인들이 많은데 학생들 38선 경비임무도 체험할겸 오늘밤은 이곳에서 보내고

내일 일요일 집에 가라는 것이였다.


☞ 국구17연대 본부가 옹진강령 농업중학교에 중대본부 주둔해 있었으며 중학교 3학년생 모두 제식교련은

물론 실탄 사격 훈련까지 교육 받은 상태였다는 사실 증언한다.
철이없는 중학교 3학년생 6명은 이구동성으로 좋습니다라고 응대한후 17연대 군인들과 항고밥을 지어먹고

산병호에서 밤이가는줄도 알지못하고 군인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  01경 군 벙커안에 들어가

 외박나간 병사담요 한자락 옷입은체 덮고 자든중 고막을 찢는뜻한 포성에 놀라 잠에서 깨어나 떨고 있을때

17연대 군이 한분이 황급히 들어오며 심상치 않은 전투가 벌어젔으니 학생들 빨리 하산 집으로 가라는

 통보 받고 까치산 하산 해 약1.5km 新康령이라는 지점에 당도하니 헌병들이 가로막으면서 외출 외박나간

 17연대 군인들이 귀대할때까지 까치산 국경선으로 다시 올라가 라는 헌병들의 강권에 하는수없이

헌병들이 지급하는 구구식 소총 받아들고 까치산 국경선으로 다시올라가다 17연대 군인들과 합유 하여

중학교3학년 학도병으로 6.25전쟁에 참전 학도병1호가된 이강성 이다,

 

6.25전쟁의 경과
6.25 전쟁의 과정은 크게 4단계로 나눌 수 있다.

 

- 제 1단계 북한의 승세 기간
북한 인민군이 4일만에 서울을 점령, 3개월 만에 대구, 부산 등 경상도 일부를 제외한 전 지역을 장악했다.
북한 인민군은 점령지역에서 당과 인민위원회를 열고 토지개혁 등의 개혁조치를 단행했다.
미국은 유엔안전보장이사회를 열어 국제 연합군이 한국전쟁 참전을 결의했고 이로써 전쟁은 국제전화 되었다.
당시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는 소련이 중국문제로 불참중이었기에 거부권 행사없이 미국의 안이 그대로 통과되었다.

 

- 제 2단계 인천상륙작전
미군을 주로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 (1950년 9월 15일) 해, 13일 만에 서울을 탈환 (9월 28일) 하고 38도선을 넘어

 평양을 점렴 (10월 13일) 했으며,한국군 일부가 압록강 근처 초산까지 진격 (10월 26일) 을 한 시기다.
전쟁의 고비는 38도선 이북으로의 진격문제에 있었다.
이승만대통령과 미국은 북진이 유리하다고 판단해 38도선을 넘었고, 미국의 영향하에 있던 유엔은

총회에서 38도선 이북 진격을 승인. 한국통일부흥위원단 (UNCURK) 를 설치했다.

 

- 제 3단계 중공군의 개입시기
유엔군의 북진에 위협을 느낀 중공군의 개입 (10월 25일) 으로 전세가 역전되었다.
한국군이 오산 부근까지 후퇴했다가 다시 38도선을 넘어서 (1951년 3월 24일) 철원, 금화 일대까지 진출

 (6월 11일) 하고,소련이 휴전을 제의 (6월 23일) 해 휴전 교섭에 들어간 시기 다.
중공군 개입으로 전쟁이 새 국면에 접어들자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만주를 폭격하고 중화민국의

장개석 군을 동원해 중국 남부지방에 제 2전선을 설정할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맥아더 장군의 전쟁확대론은 세계대전으로의 확대로 이어질 수 있어서, 이를 우려한

미국정부에 의해 저지되었고 맥아더 장군은 해임 (4월 11일) 되었다.


- 제 4단계 휴전 협정의 성립시기
소련 유엔대표의 휴전제의를 미국이 받아들여 15일 만에 개성에서 예비회담이 개최(7월 8일) 되고, 이어서

본회의가 (7월 10일) 열렸다. 비무장지대 설치를 위한 군사경계선 설정, 휴전 감시기관 구성, 포로교환 등의

주요 문제를 논의했다. 휴전 회담은 전투가 계속되는 가운데 진행되었고, 우리 민족의 염원과 의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이승만대통령 은 휴전 반대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으나, 미국은 한미상호안전보장조약 체결, 경제원조,

한국군 증강 등의 조건으로 이승만대통령을 무마 시켰다.1953년 7월 27일 유엔군과 북한 인민군 사이에

 휴전협정이 조인됨으로써 마침내 전쟁은 끝나고 휴전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
휴전협정에 의거, 한반도 장래문제를 논의하는 정치회의가 1954년 4월 26일 제네바에서 열렸으나

아무런 성과없이 결렬, 남북 분단은 확정되어 반세기가 지나도록 원한의 38선 한반도를 절반으로

갈라놓은 통한의 국경선은 언제쯤 철장 장막을걷고 南과 北이 자유롭게 왕내 할수 있을 것인가?


6.25전쟁의 결과
6.25 전쟁은 남북 양측에 약 150만명의 사망자와 360만명의 부상자 일천만 이산가족을 냈다.
국토의 피폐와 폭격으로 인한 북한지역의 피해는 극심했고, 남북의 적대감이 극도로 심화되어

민족분단의 체재가 더욱 굳어지게 되었다.남한은 반공사상,북한은 공산상이 전 사회를 지배할

 정도가 되었고, 대외적으로는 동서냉전을 격화시키는 고비, 미·일 안전보장체제를 재촉,

 일본의 재군비강화와 전쟁경기를 통한 고도성장의 기초를 마련해주었다.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가.
통일이 되면 남한에 어마어마한 경제적 희생이 뒤따라야 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지만

그 희생은 우리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는 투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네티즌 여러분은 통일을 바라고 원하고 계십니까?
다시는 이 땅에 있어서는 안 될 한반도 전쟁의 아픔을 되새기고, 6.25참전용사들의 고귀한 희생을

기리는 오늘 하루만이라도 되어 주시길 바라며 6.25참전 노병들 얼마 남지않은여생 이제는

 좀 경제적 타격없이 살다 생을 마감할 수 있게 사랑하는 국민들과

18대정부,20대 여,야 국회 의원들께 소원합니다.


 

 

☆ 6.25 한국전쟁 유엔군 자격 참전국 현황 ☆

 


 

 




 

 

 

 

 

 

 

 

 

 

 

 

 

 

 

 

 

 

 

 

 

 

 

 

 

 

 

 

 

 

 

 

 

 

 

 

 

 

 

 

 

 

625전쟁 잊을 수 없는 상처

 

6.25의 노래 / 박두진 작사 김동진 작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