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는 원칙(元則)이며 호는 계남(溪南) 또는 존와(存窩)이다.공은 모산공
최기필(崔琦弼)의 8세손이고 최중길(崔重吉)공의 아들이다.
공은 어머니 진양 하씨가하늘에서 신선이 문에와서 자손을 내려주는
꿈을 꾸어 그 뒤에 공을 낳았는데, 태어날 때 목소리와 용모가 남달랐다.
말을 배우지 마자 영특하였고 글을 배울때 공부하기를 재촉하지 않아도
스스로 힘을 써서 6~7살에 벌써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대략
섭렵하였다.공의 형인 귤하(橘下)공 최식민(崔植民)은 충성스러운 성품과
넓은 도량을 지녔고 문학에 아주 뛰어났으나 공의 뜻을 이루어 주기
위해서 스스로 집안의 일을 도맡아 공을 학문에 전념하게 하였다.
공은 당시의 선비들을 좋하지 않아서 선비들이 찾아오면 번번이 자리를
피해 가서 글을 읽었다. 노사 기정진(蘆沙奇正鎭) 선생이 호남에서 뛰어나다
는 말을 듣고 월고 조공성(月皐趙公性)의 집에 나아가 그 도학의 실체를
물어보고 흠모하며 존경하였다. 그레서 선친에게 아뢰고 가서 따르려고 할 때,
사람들은 당파가 다르다고 하여 저지하며 의견이 시끄러웠으나 공은 못들은
척 하고 예물을 갖추어 가서 평소에 의문나는 점을 여쭈었더니 선생은
정성스럽게 풀어서 대답해 주었다. 공은 선생을 스승으로 섬기면서
주리심법(主理心法)을 터득하였으며 항상 경술(經術)을 밝혀 후배 지동에
힘썼다. 공이 돌아가겠다고 말씀드리자 선생께서는 논어를 읽으라고
권하면서 “옛 사람들은 아래로는 인간의 일을 배워서 위로는 천명에
이르게 되어 스스로 차례가 있으니, 예를 들면 예기의 증자문(曾子問)편이
그러한 것이다. 깊이 공부하여 오랫동안 노력하면 일관(一貫)의 뜻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만년에는 단성에서 살면서 집 뒤에 서재를 지어 연꽃과 매화를 심고,
그 사이에 편히 앉아 날마다 학자들과 경문(經文)을 논하고 예를 토론하였다.
공은 악름다운 산수경치를 좋아하는 성품이라 팔도를 거의 모두 유람하였는데,
지리산, 덕유산, 지굴산, 금악(錦岳)은 여러번 유람하였고 속리산을 지나
화양동을 찾아보고 삼각산에 오르고 천마산을 밟으며 정처없이 돌아다니면서
속세를 벗어나려는 뜻이 있었다.(진양속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