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둥성(山東省) 약도
본명이 구(丘)인 孔子는
서기전 551년에 魯나라 창평향(昌平__)
추읍(鄒邑) 1) 에서 태어났다.
공자의 아버지인 숙량흘(叔梁紇) 2) 은
추읍 대부(大夫)로,
무예를 갖추었고 완력이 있었다.
취푸 ( 曲阜 ) 현성(縣城)의 남문인 仰聖門
사마천의 ‘ 史記·孔子世家 ’ 에 따르면
숙량흘이 안씨(顔氏) 여인과
합하여 공자를 낳았다고 한다.
‘ 공자가어(孔子家語) ’ 에 따르면
숙량흘이 시씨(施氏)와 결혼하여 딸만 아홉을 두었다.
아들을 기다리던 숙량흘은 첩을 얻어
아들 맹피(孟皮)를 얻었으나,
그는 다리가 불편한 장애를 갖고 있었다.
武士인 숙량흘은 가문을
이을 건장한 사내아이를 원하였다.
일흔두 살이 되던 해에
숙량흘은 안양(顔襄)의 셋째 딸인 열여덟살의
안징재(__徵在)를 취하였다.
3) 안징재는 취푸에서 약 2㎞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니치우산(尼丘山)에서 기원을 한 후 공자를 얻었다.
혹자는 산(尼丘山)의 이름을 따서 공자의 이름을 지었다고 하지만
사마천은 史記에서
공자가 태어나면서부터 머리가 움푹 들어갔기
때문에 ‘ 구(丘) ’ 라 하였다고 전한다.
공자가 3살이 되던 해에 숙량흘이 사망하였다.
안징재는 서자로 괄시 받던 공자를 데리고
취푸( 曲阜 )의 췌리(闕里)로 이주하여,
공자가 장성하기까지 부양하였다.
孔廟 내에 9개의 정원 이 있다.
이러한 숲길을 따라 3번 째 정원에 들어
서면 외부와 완전히 차단되어지고
사당(廟)의 엄숙함에 길들게 된다.
그러나 지금은
범인(凡人)들에게는 그저 혼잡스런 관광지일 뿐이다.
사상가, 정치가, 교육가, 군략가였던 공자의 가르침은
중국, 한국, 일본, 베트남등에 큰 영향력을 과시하여 왔다.
공자와 그의 가르침 기리기 위하여
고향인 취푸( 曲阜 )에 孔廟, 孔府, 孔林을 조성 하였다.
孔廟는--- 공자를 기리는 사당이고,
孔府는--- 공자의 직계 자손이 대대로 살아 온 주거 공간 이다.
孔林은-- 공자와 그 후손들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이들 사적(史蹟)을 싼쿵(三孔)이라하는데,
1994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金, 元 시기(1115년-1368년)에 세워진 碑亭, 모두 13개가 있다.
孔廟는
2400여년이 넘도록 제사가 한 번도 끊인 적이 없는,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공자 사후(死後) 일 년 후인 서기전 478년에,
노(魯) 애공(哀公)이
공자가 살던 집에서
그의 의관(衣冠)을 놓고 제(祭)
를 지내면서 쿵먀오(孔廟)가 시작되었다.
奎文閣.
송나라 때인 1018년에 건축되어, 명(明)대인
1504년과 지난 세기인 1985년에 개수되었다.
역대 황제들이 하사한 경서(經書) 등이 보관되어 있다.
BC205년 漢 高祖 유방이
황제로서 처음 孔廟에서 공자에게 제례 를 지냈다.
이후 많은 황제들과 고관대작들이 前例로 따르게 되었 다.
황제로 즉위하거나 전쟁에서 승리할 경우 쿵먀오를 찾았다.
12명의 황제가 20번이나 개인적으로 방문하여
공자에게 제례를
지냈다.
약 100여명의 황제는
자신을 대신해서 공자에게 제례를
지내기 위해 관리를 196번이나 파견하였다.
성지뎬(聖迹殿),
1592년에 제작된 120장의 석각판으로 이루어진
공자 사적도
3개 공간으로 이루어졌던 공자가 살던 집
- 묘는, 공자의 위상이
올라간 수(隋)나라 때, 서기 611년에 대규모로 재건되었다.
송(宋)나라 때 묘(廟)는 3개 구역과 4개 뜰로 꾸며져 확장되었고,
묘 주변에 400개가 넘는 방들이 배치되었다.
금(金)나라 말기인
1214년에 화재 와 약탈로 인하여 묘가 파괴되었다.
원(元)나라 초기에 묘는 이전보다 확장되어 재건되었다.
1499년 화재로 인하여 또 다시 폐허가 된 후에
孔廟는 마침내 현재와 같은 규모로 재건되었다.
그러나 묘 내에 건물과 장식들은 그 후에도 속 추가되었다.
전체적으로 孔廟는 15번이나 크게 개선되었고,
31번이나 대규모로 수리를 하였고,
수많은 작은 건물이 배치되었다.
청(淸) 건륭제(乾隆帝)가 기대어 기울어졌다는 나무.
지금의 쿵먀오(孔廟)는
중국에서 쯔진청(紫禁城) 다음으로 규모가 큰
역사적 건물이다.
장방형 묘에는 460개 방을 가진 건물들이
16,000 ㎡의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1499년의 화재 이후 명(明) 도성(都城)인 쯔진청을 본 따
묘가 새롭게 조성되었다.
묘의 주요 부분은 9개 정원을 둘러싼 건물들이다.
건물들은 남북으로 이어진 1.3㎞의 직선을 중심으로 하여,
좌우대칭으로 배치되어 있다.
孔廟 입구로 들어서면 만나게 되는 3개 정원은
작은 문들과 키 큰 소나무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외부와 격리시키는 역할을 한다.
네 번째 정원부터 건물들을 만나게 된다.
성시먼(聖時門)
싱탄(杏檀), 살구나무 아래서 공자가 제자들을 가르쳤던
곳을 기리고 있다.
주요 건물로는
금(金)나라와 원(元)나라 시기에 세워진 13개의 碑亭,
송(宋)나라 때인 1018년에 건축되어
명(明)대인 1504년과 지난 세기인 1985년에 개수된 奎文閣,
살구나무 아래서 공자가 제자들을 가르쳤던 곳을
기린 싱탄(杏檀),
그리고 공자에게 제례를 지내는 大成殿 등이 있다.
大成殿, 용을 조각해 놓은 魚卵石이 보인다.
大成殿은 묘의 중심 건물로 공자와 안회(顔回),
자사(子思), 증삼(曾參), 맹자(孟子) 등이 모셔져 있다.
가로가 54m, 세로가 34m, 높이가 32m인 건물은
청(淸)대에 보수된 것이다.
공자가 직접 심었다는 노송나무.
공자가 직접 세 그루의 나무를 심었으나,
두 그루는 고사(枯死)하고 현재 한 그루만 남아 있다.
건물은 장식된 28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다.
기둥은 직경이 0.8m이고
높이가 6m로 각각이 한 개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전면(前面)에 있는
10개의 기둥에는
각기 용 두 마리가 승천하는 것 같은 모습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것들은 황제의 방문 기간 중에 황제가 시샘을 느끼지
않게 하기 위해 천으로 덮어두었다고 한다.
대성전 앞뜰에서
매년 9월 28일 5) 에 공자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한
의식이 행해진다.
분서갱유 때 경서를 숨겼던, 공자가 사용했던 우물인
孔宅古井과
노(魯)나라 시대의 담장인 루삐(魯壁). 6)
취푸( 曲阜 )의 문화 유물들은
문화대혁명 때에 광범위한 손상을 입었다.
1966년 11월
북경 사범 대학교 교직원과 학생들로 구성된
200여명의 ‘ 문화혁명소조 ’ 가
취푸에 와서 6,000여점 이상의 유물을 파괴하였다.
당시 주동자는 탄허우란(譚厚蘭)이란 여성이었다.
이들이 ‘ 토공대회(討孔大會) ’ 를 열었었는데,
무려 10만 명이 동원되었다
(현재 취푸의 도심 주거 인원이 6만 5천명이다).
쿵린(孔林) 입구
취푸( 曲阜 ) 북쪽에 위치한 쿵린(孔林)은
중국에서 제일 크고 오래 된 가족 무덤으로,
세계적으로도 최대 규모다.
원래 이름이 ‘ 성린(聖林) ’ 인 이곳에
공자와 10만이 넘는 그의 후손들 무덤이,
1만여 그루가 넘는 나무숲 사이에 산재해 있다.
주수이챠오(洙水橋)와 주수이(洙水)
쿵린(孔林)의 정문인 얼린먼(二林門)을 지나면,
성벽에 둘러싸인 광대한 묘역인 쿵린으로 들어가게 된다.
泗水의 지류인 주수이(洙水)를 건너 숲길을 한참 들어가면,
노란색 기와와 붉은 기둥의 享殿 뒤로 공자 무덤이 있다.
샹뎬(享殿)의 문인석(文人石)
쓰수이(泗水) 연안에 조성된 공자 무덤은
원래 규모도 작고 봉분도 없었다.
수(隋)나라에 이르러 공자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무덤이 크게 확장되어졌다.
공자 무덤.
예서(隸書)로 쓰인 금빛 묘비(大成至聖文宣王墓)가 있다.
묘비는
명대(明代)인 1443년에 건립되었다.
‘왕(王)’자는
제단에 가려 ‘간(干)’자처럼 보이게끔
세로로 길게 획을 긋는 세심함이 엿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마음 씀도 소용없이 문화대혁명 때 무참하게 훼손되었다.
공자 후손의 무덤과 비석들이 공자의 무덤 주위에 추가되어졌다.
춘추시대부터 조성된 이들의 무덤은 최근에 조성된 직계 76대,
방계 78대 자손의 무덤까지 있다.
공자 아들인 사수후(泗水候)
공리(孔鯉) 무덤(왼쪽)과 손자인 기국술성공(沂國述聖公) 자사(子思, 본명이 孔伋이며 中庸의 저자) 무덤(오른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