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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문화부 장관인 차이우(蔡武) 부장은 2200여 전 중국 진시황(秦始皇.BC 259~210)의 불로장생(不老長生)의 사신이었던 서복(徐福) 동상을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에 잠겼을까.
차이우 부장은 26일 서귀포시 서귀동 정방폭포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서복공원을 찾았습니다.
중국 원자바오(溫家寶) 총리의 친필 휘호인 ‘徐福公園’이 새겨진 태산석 제막식에 참석하는 길이었습니다. 원자바오 친필 태산석은 이미 지난 6월 서복공원으로 옮겨져 설치돼 있었습니다. 차이부 부장이 24일부터 서귀포시 중문관광단지에서 열린 한.중.일 문화장관 회의에 참석했었는데요, 이날 태산석 제막식도 차이우 부장의 일정에 맞춘 한중친선협회와 서귀포시의 배려인 듯 합니다.
이세기 한중친선협회 회장(오른쪽)과 악수하며 환하게 웃고 있는 차이우 중국 문화부 부장.
원자바오 총리의 휘호는 2007년 4월 한중친선협회 이세기(李世基) 회장이 한중교류 15주년 개막식 참석차 방한한 원자바오 총리에게 서복공원의 건립 취지를 설명한 뒤 받은 것이랍니다. 원자바오 총리는 취임한 뒤 중국내에 어느 곳에도 휘호를 남기지 않고 있다고 하네요. 태산석은 서복의 고향인 산둥성(山東省) 장다민(姜大明) 성장이 기증한 것으로 높이 3.5m, 무게 18t 규모로 제작됐습니다.
이날 제막식의 공식 일정은 오전 10시 30분부터 1시간 가량 진행될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차이우(蔡武) 중국 문화부 장관과 청융화(程永華) 주한 중국대사 등 중국 정부 관계자는 행사가 시작되기 30여 분전부터 서복공원을 둘러보며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렇다면 서복은 누구이고, 서귀포와 어떤 인연이 있을까?
서귀포시 서복공원에 있는 서복석상.
서복에 대한 기록은 중국 역사서에 나옵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는 서불(徐巿)로 기술돼 있습니다. 사기 진시황본기에는 진시황 28년에 서불이 상소를 올려 '해중(海中)에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洲)의 삼신산이 있는데 선인이 거기 산다. 동남녀(童男女)를 데리고 가 정성으로 구하면(선약을) 얻을 것이다. 그래서 동남동녀 수천명과 함께 서불(徐巿發童男女數千人)을 보내 바다 건너 선인을 찾도록 하였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이어 진시황 37년에는 서불이 돌아와 봉래에 도착했으나 큰 상어가 있어서 얻지 못했으니 군대를 얻어 가지고 다시 출발했다고 하네요. 이 대목은 사기의 회남형산(淮南衡山) 열전에 더 구체적으로 나오는데 남녀 3000인과 오곡의 종자와 각종 직공을 딸려 보냈더니 서복이 평원광택(平原廣澤)을 얻어 (나라를 세우고)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서복과 서귀포의 인연은 500여 명의 동남동녀(童男童女)를 데리고 영약(靈藥)을 찾기 위해 바다 끝 신산(神山)인 가운데 하나인 영주산(瀛洲는 제주의 옛 지명으로, 영주산은 한라산)을 찾았다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제주시 조천으로 들어온 서복은 영주산에서 불로초(영지버섯, 당귀, 시로미 등)를 캐고 서귀포 앞바다 정방폭포 벽면에 ‘서불과지(徐巿過之. 서불이 지나간 곳)’라는 글을 새겼답니다. 이 글은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추사 김정희 선생이 고증을 해 유명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서귀포(西歸浦)라는 지명도 서복 일행이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데서 유래됐다는 설이 있습니다.
서귀포시 정방폭포에 새겨진 '서불과지(徐巿過之)'
그래서 서귀포시는 국회 문화공보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이세기 한중친선협회 회장의 도움을 받아 2003년 정방폭포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5000여 평의 부지에 서복공원을 조성했습니다. 중국 관광객을 끌어들이기 위한 관광자원화 방안이었죠.
이후 한중친선협회는 2004년 11월 산둥성 룽커우시(龍口市) 서복공원을 둘러본 뒤 산둥성 정부에 서복 석상을 요청했답니다. 그래서 2005년 5월18일 서복축제날에 높이 3m 규모의 서복동상을 기증받고, 서귀포시 서복공원으로 옮겼다고 하네요.
사실 서복의 동도(東渡)에 대한 전설은 제주도보다는 일본에 더 많다고 하네요. 심지어 일본의 국가기원에 갖다 붙이기도 합니다. 일본 최초의 천황인 신무천황(神武天)皇이 서복이라는 설입니다. 서복이 불로초를 구하지 못하자 함께 데리고 간 군사와 어린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들과 일본에 정착해 일본을 세웠다는 것이죠. 오사카와 접해 있는 와카야마(和歌山)에도 서복공원이 있는데, 이 곳에는 서복의 묘도 있다고 하네요.
어째든 중국인들은 서복을 중국의 우수한 문화를 한국과 일본에 전파한 인물이자 상징으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복공원에 머문 약 2시간 동안 차이우 부장의 얼굴에는웃음이 가득했습니다. 어쩌면 그는 한.중.일 세 국가의 중심지에 위치한 제주도 서귀포 앞바다에서 ‘서복의 부활’을 머릿속으로 그려본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차이우 중국 문화부 부장이 서복전시관에 쓴 방명록.
서귀포시 서복공원에서 바라본 정방폭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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