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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김삿갓 그는 누구인가 ?

by joolychoi 2007. 9. 22.
 
김삿갓 그는 누구인가 ?

:

:

[김병연의 초상]

: :
- 김병연[삿갓]의 시비-
 
전두환 대통령의 18번이 무었 인지 아시나요 ?

           기분이 좋거나 술이 한잔 거나하시면 곧장 즐겨

           불렀다는 이 노래....

 

 죽장에 삿갓 쓰고 방랑 삼천리
 
흰 구름 뜬 고개 넘어 가는 객이 누구냐
 
열두 대문 문간방에 걸식을 하며
 
술 한 잔에 시한수로 떠나가는 김 삿갓.
 


 

김 삿갓(金笠) 의 본성명 김병연(金炳淵·)으로

본관은 안동이며호는 “난고(蘭皐)” 인데

철종 때의 사람이다.

 

1807년[순조7]  김안근 과 함평 이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서 향년 56세인 1863년에 세상을

떠났다.그가 방랑시인이 된 동기는 모친과 영월에 살적,

영월 관아에서 열린 백일장에 나가 장원을 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자기의 조부를 조롱한 시제였더란 것.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

이의 죄책으로 삿갓을 쓰고 전국을 방랑 하며 숫한

풍자적이고 해학이 넘치는 많은 시를 읊다가 전남화순

동복에서 일생을 마쳤다.

 


- 김삿갓의 묘소와 비석 -


그의 묘는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 와석리 노루목 에

있으니 가공 없는 상석과 자연석에 새겨진 비가

우리를 숙연하게 한다.

다음과 같은 글의 시비는 광주 무등산 잣 고개에도

세워져 있다.


[시비 내용 ]
 
이십수하삼십객(二十樹下三十客) : :
사십촌중오십식(四十村中五十食) : :
인간개유칠십사(人間豈有七十事) : :
부지귀가삼십식(不知歸嫁三十食) : :
 
 스무 나무 아래 설운 나그네에게 : :
망할 놈의 마을에선 쉰밥을 주는 구나 : :
인간에 이런 일 이 어찌 있는가 : :
내 집에 돌아가 설은 밥을 먹느니만 못하니라



 
 

1. 방랑시인이 된 배경

   
 
조선 순조 11년(1811년),  홍경래(1780-1812)는 西北人을
관직에 등용하지 않는 조정의 정책에 대한 반감과
탐관오리들의행악에 분개가 폭발하여
평안도 용강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홍경래는 교묘한 수단으로 동지들을 규합하였고,
민심의 불평 불만을 잘 선동해서 조직한
그의 반란군은 순식간에 가산, 박천, 곽산, 태천,
정주 등지를 파죽지세로 휩쓸어 버리고 군사적
요새지인 선천으로 쳐들어갔다. 
 
이 싸움에서 가산 군수 정시(鄭蓍)는 일개 문관의
신분이었지만 최후까지 싸워서 비장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한편 김병연의 조부 김익순(金益淳)은 관직이 높은
선천 방어사였다. 그는 군비가 부족하고 대세는
이미 기울어져 있음을 낙심하다가, 날씨가 추워서
술을 마시고 취하여 자고 있던 중에 습격한
반란군에게 잡혀서 항복을 하게 된다.
김익순에게는 물론 그 가문에도 큰 치욕이었다.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고 하지만 국법의 심판은
냉혹하여서, 이듬해 2월에 반란이 평정되자 김익순은
3월 9일에 사형을 당하였다.
 
 그 난리 때 형 병하는 여덟 살, 병연은 여섯 살,
아우 병호는 젖먹이였다. 
마침 김익순이 데리고 있던 종복에 김성수라는
좋은 사람이 있었는데 황해도 곡산에 있는
자기 집으로 병하, 병연 형제를 피신시키고
글공부도 시켜 주었다.
 
그 뒤에 조정의 벌은 김익순 한 사람에게만 한하고,
두려워하던 멸족에는 이르지 않고 폐족에
그쳤으므로 병하, 병연 형제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김병연의 가족은 서울을 떠나
여주, 가평으로 이사하는 등 폐족의 고단한 삶을
살다가 부친이 화병으로 세상을 떠난후 홀어머니
함평 이씨가 형제를 데리고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삼옥리로 이주하였다
 
김병연이 스무 살이 되던 1826년(순조 32년),
영월 읍내의 동헌 뜰에서 백일장 대회 시제(詩題)인
'논정가산 충절사, 탄김익순 죄통우천'
(論鄭嘉山忠節死嘆金益淳罪通于天)을 받아
본 그는 시상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정의감에 불타는 그의 젊은 피는 충절의
죽음에 대한 동정과 찬양을 아끼지 않았고,
김익순의 불충의 죄에 대하여는 忘君, 忘親의 벌로
만번 죽어도 마땅하다고 추상같은 탄핵을
하였다. 김병연이 이 백일장에서 장원을 한 날,
어머니가 그 동안 숨겨왔던 집안의 내력을 들려 주었다.
 
우리 가문은 대대로 명문거족이었다.
너는 안동 김씨의 후손이다. 안동 김씨 중에서도
장동(壯洞)에 사는 사람들은 특히 세도가 당당했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그들을 장동 김씨라고 불렀는데
너는 바로 장동 김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
 
김삿갓의 생가 모습

네가 오늘 만고의 역적으로 몰아 세워 욕을 퍼부은,
익자(益字) 순자(淳字)를 쓰셨던 선천 방어사는
네 할아버지였다. 
 
너의 할아버지는 사형을 당하셨고 너희들에게
이런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느라고 제사 때
신주를 모시기는커녕 지방과 축문에 관직이
없었던 것처럼 處士로 써서
너희들을 속여 왔다.
 
병연은 너무나 기막힌 사실에 말문이 막혀 버렸다. 
반란군의 괴수 홍경래에게 비겁하게 항복한
김익순이 나의 할아버지라니...
 
그는 고민 끝에 자신이 조부를 다시 죽인 천륜을
어긴 죄인이라고 스스로 단죄하고,
뛰어난 학식에도 불구하고 신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할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삿갓을 쓰고
방랑의 길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2. 김 삿갓의 사상

김삿갓의 방랑 생활은 출발 동기부터 불평객과
반항아의 색채를 띠고 있다.
그것은 그가 가명을 김란이라 하고 난고(蘭皐) 라는
호(號)로 불리고 머리에 삿갓을 쓴 사실에서 알 수 있다. 
 
그의 불평과 반항은 계급적 몰락에서 오는
개인적 입장에서 시작되었으나 세월의 흐름과 함께
폭넓은 사회 경험을 함에 따라 세계관과
사회관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즉 조선 왕조에 대해 은근히 반대의 감정을
표시한 것은 물론 봉건 질서와 제도를 부정하는
태도를 취하였으며 빈부의 차가 심한 사회적
불합리를 저주하고 양반 귀족들의 죄악과 불의,
거만, 허식을 증오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중년을 넘으면서 점점 더 심해졌다.
그의 사상에 이러한 변동이 일어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폐족이라는 계급적 지위, 종의 집에서 자라난
유년 시기의 성장 과정, 또는 일생의 방랑 생활이
말해주는 불우한 사회적처지 등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이유로 그가 살던 조선 말기의
사회 환경과 시대 특성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불행한 사람과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깊은 동정을
표시하고 만인이 갈망하는 벼슬을 포기함과
동시에 당시 봉건 질서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 그 사상과 태도 속에는
멸망과 붕괴에 직면한 민중들과 사회의 시대적
기운이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사상과 결부하여 몇 가지 특징을 말한다면
 
그의 사상에서 가장 중심적인 경향은 강한 의분과
정의감에 기초한 반항 정신과 풍자 정신이었으며
인도주의로 받침 되는 평민 사상이었다.
이 외에 자유분방함, 노골적인 연애 감정,
낙천성과 풍부한 유머, 개개 사물에 대한
實事求是적인 관심등의 경향도 있으나
그것은 부차적인 의의를 가지거나 중심 사상의
간접적이며 우회적인 표현에 불과하다.
 
첫째, 이러한 사상 경향의 심도와 강도가 매우 철저하고
강렬했다. 일생 동안 방랑 생활을 하는 중 그의 아들이
세 번이나 찾아와서 귀가를 간청하였으나 끝까지
돌아가지 않은 점, 모친이 계신 외가가 있는 마을을
지날 때는 들러서 직접 만나지는 않고,
산에 올라가 나무하러 온 아이들에게 안부를 묻고
갔다는 이야기, 친구 정현덕의 주선으로
왕의 사면을 받고 벼슬 받을 기회를 거절했다는
사실 등에서 그러한 특성을 볼 수 있다. 
 
둘째, 사상 경향의 표현 방법과 형태가 매우 다양하고
복잡하였다. 우선 방랑 생활 자체가 불평과
반항의 한 표현이었다.
그 이전의 많은 반항아들 역시 이 방법을 취했으니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이 일생을 방랑객으로
지냈고 봉건 체제에 반항했던 허균(許筠)도 강원도,
경기도 등을 방랑하다가 발각되어 사형을 당하였다.
기이하고 광적(狂的)인 행동도 반항적 태도의
한 표현이었다.
 
황오(黃五)의 녹차집(綠此集)에는 '하루는 정현덕이
내게 편지를 보내오기를 천하 기남자(奇男子)가
여기 있는데 한번 가 보지 않겠는가 하기에
같이 가 보니 과연 김삿갓 이더라. 사람됨이
술을 좋아하고 광분하여 익살을 즐기며 시를 잘 짓고
취하면 가끔 통곡하면서도 평생 벼슬을 하지 않으니
과연 기인이더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석우는 해장집(海藏集)에서 '과거장에 들어가되
어떤 때는 수십 편을 짓고 나오고 어떤 때는
한편도 안 짓고 나오니 그 광태가 이와 같더라....
과거장 밖의 술집에서도 그의 이름을 사랑하나
그 광태를 무서워하여 술을 모조리 먹어도 돈을
요구하지 않았다'라고 그의 기행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또 상대방을 공격할 때는 큰소리로
웃어주기도 하고 풍자와 재담으로 비꼬기도 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취하였다. 이것은 일반 대중이
그와 그의 예술을 사랑하는 요인이 되었으며
일부 양반들도 그를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었다. 
 
한편 즐겨 쓴 삿갓 역시 변형된 투쟁 무기였으니
보기 싫은 당시 사회와 세상에 대한 불평불만의
사상적 표현이었다. 김 삿갓은 조부를
탄핵하고 스스로 세상을 등진 죄인이라기보다는
봉건적인 지배 계급에 대한 반항아라는 사회 정치적
각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3. 해학적인 시모음

<내 삿갓>

자신의 조부를 탄핵하고 시작한 방랑 생활.
언제나 벗이 되어 주며 비바람에도 몸을 보호해
주는 삿갓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했다.
그리해서 '병연'은 그 이름과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삿갓을 쓴 이름 없는 시인이 되었다....
그가 읊은 자신의 '삿갓'시는 표연 자적하는
자연과 풍류 속의 자기 운명을 그린
자화상이었다.
 
가뿐한 내 삿갓이 빈 배와 같아
한번 썼다가 사십 년 평생 쓰게 되었네.
목동은 가벼운 삿갓 차림으로 소 먹이러 나가고
어부는 갈매기 따라 삿갓으로 본색을 나타냈지.
취하면 벗어서 구경하던 꽃나무에 걸고
흥겨우면 들고서 다락에 올라 달구경하네.
속인들의 의관은 모두 겉치장이지만
하늘 가득 비바람 쳐도 나만은 걱정이 없네.
 
[詠笠]
 
浮浮我笠等虛舟一着平生四十秋 
牧堅輕裝隨野犢漁翁本色伴沙鷗 
醉來脫掛看花樹興到携登翫月樓
俗子依冠皆外飾滿天風雨獨無愁

<대나무 시>

이대로 저대로 되어 가는 대로
바람 치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밥이면 밥, 죽이면 죽, 이대로 살아가고
옳으면 옳고 그르면 그르고, 저대로 맡기리라.
손님 접대는 집안 형세대로
시장에서 사고팔기는 세월대로
만사를 내 마음대로 하는 것만 못하니
그렇고 그런 세상 그런대로 지나세.
 
[ 竹詩 ]
 
此竹彼竹化去竹風打之竹浪打竹
飯飯粥粥生此竹是是非非付彼竹
賓客接待家勢竹市井賣買歲月竹
萬事不如吾心竹然然然世過然竹
 

<가난이 유죄>

지상에 신선이 있으니 부자가 신선일세.
인간에겐 죄가 없으니 가난이 죄일세.
가난뱅이와 부자가 따로 있다고 말하지 말게나.
가난뱅이도 부자 되고 부자도 가난해진다오.
 
[難貧]
 
地上有仙仙見富人間無罪罪有貧
莫道貧富別有種貧者還富富還貧

 

 


<시시비비>

이 해 저 해 해가 가고 끝없이 가네.
이 날 저 날 날은 오고 끝없이 오네.
해가 가고 날이 와서 왔다가는 또 가니
천시(天時)와 인사(人事)가 이 가운데 이뤄지네.
 
[是是非非詩]
 
年年年去無窮去日日日來不盡來 
年去月來來又去天時人事此中催 
 
옳은 것 옳다 하고 그른 것 그르다 함이 꼭 옳진 않고
그른 것 옳다 하고 옳은 것 그르다 해도 옳지 않은 건 아닐세.
그른 것 옳다 하고 옳은 것 그르다 함, 이것이 그른 것은 아니고
옳은 것 옳다 하고 그른 것 그르다 함, 이것이 시비일세.
 
是是非非非是是是非非是非非是 
是非非是是非非是是非非是是非
 
 
<젖 빠는 노래>

어느 선비의 집에 갔는데 그가 "우리 집 며느리가
유종(乳腫)으로 젖을 앓기 때문에 젖을 좀 빨아
주어야 하겠소"라고 했다.
 
김 삿갓이 망할 놈의 양반이 예의도 잘 지킨다고
분개하면서
이 시를 지었다.

시아비는 그 위를 빨고, 며느리는 그 아래를 빠네.
위와 아래가 같지 않지만, 그 맛은 한가지일세.
시아비는 그 둘을 빨고, 며느리는 그 하나를 빠네.
하나와 둘은 같지 않지만, 그 맛은 한가지일세.
시아비는 그 단 곳을 빨고, 며느리는 그 신 곳을 빠네.
달고 신 것이 같지 않지만, 그 맛은 한가지일세.

[嚥乳]

父嚥其上婦嚥其下
上下不同其味卽同
父嚥其二婦嚥其一
一二不同其味卽同
父嚥其甘婦嚥其酸
甘酸不同其味卽同
 
<서당 욕설시>

추운 겨울날 서당에 찾아가 재워주기를 청하나
훈장은 미친 개 취급하며 내쫓는다.
인정 없는 훈장을 욕하는 시. 소리 나는대로
읽어야 제 맛이 난다.
 
서당을 일찍부터 알고 와보니,
방 안에 모두 귀한 분들일세.
생도는 모두 열 명도 못 되고,  
선생은 와서 뵙지도 않네.
 
 
[辱說某書堂]
 
書堂乃早知房中皆尊物
 
生徒諸未十先生來不謁
 
 
김 병연은 이처럼 해학과 풍자가 넘치는
방랑시인생활 30년을 지내면서 가장 진솔하고
마음에 와닫는 시를 읊었다면 바로
자신을 이야기 한 <난고평생>이란
시를 들수가 있다.
 
 
<기생과 함께 짓다>

평양감사가 잔치를 벌이면서 능할 능(能)자
운을 부르자 김삿갓이 먼저 한 구절을 짓고
기생이 이에 화답하였다
 
김 립 - 평양 기생은 무엇에 능한가.
기 생 - 노래와 춤 다 능한 데다 시까지도 능하다오.
김 립 - 능하고 능하다지만 별로 능한 것 없네.
기 생 -  달 밝은 한밤중에 지아비 부르는 소리에
          더 능하다오.
 
[妓生合作]
金笠. 平壤妓生何所能  평양기생하소능
妓生. 能歌能舞又詩能  능가능무우시능
金笠. 能能其中別無能  능능기중별무능
妓生. 月夜三更呼夫能  월야삼경호부능
 

<난고 평생시>

새도 둥지가 있고 짐승도 굴이 있건만
내 평생을 돌아보니 너무나 가슴 아파라.
짚신에 대지팡이로 천 리 길 다니며
물처럼 구름처럼 사방을 내 집으로 여겼지.
 
남을 탓할 수도 없고 하늘을 원망할 수도 없어
섣달 그믐엔 서글픈 마음이 가슴에 넘쳤지.
초년엔 즐거운 세상 만났다 생각하고
한양이 내 생장한 고향인 줄 알았지.
 
집안은 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렸고
꽃 피는 장안 명승지에 집이 있었지.
이웃 사람들이 아들 낳았다 축하하고
조만간 출세하기를 기대했었지.
 
머리가 차츰 자라며 팔자가 기박해져
뽕나무밭이 변해 바다가 되더니,
의지할 친척도 없이 세상 인심 박해지고
부모 상까지 마치자 집안이 쓸쓸해졌네.
 
남산 새벽 종소리 들으며 신끈을 맨 뒤에
동방 풍토를 돌아다니며 시름으로 가득 찼네.
마음은 아직 타향에서 고향 그리는 여우 같건만
울타리에 뿔 박은 양처럼 형세가 궁박해졌네.
 
남녘 지방은 옛부터 나그네가 많았다지만
부평초처럼 떠도는 신세가 몇 년이나 되었던가.
머리 굽실거리는 행세가 어찌 내 본래 버릇이랴만
입 놀리며 살 길 찾는 솜씨만 가득 늘었네.
 
이 가운데 세월을 차츰 잊어 버려
삼각산 푸른 모습이 아득하기만 해라.
강산 떠돌며 구걸한 집이 천만이나 되었건만
풍월시인 행장은 빈 자루 하나뿐일세.
 
천금 자제와 만석군 부자
후하고 박한 가풍을 고루 맛보았지.
신세가 궁박해져 늘 백안시당하고
세월이 갈수록 머리 희어져 가슴 아프네.
 
돌아갈래도 어렵지만 그만둘래도 어려워
중도에 서서 며칠 동안 방황하네.  
 
 
 
      - -<청산리 재편집 >- -
 
**-< 모셔 온 글 >-**
 
출처 : 개내(gaenea))
글쓴이 : joolychoi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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